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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마 Sep 14. 2020

차이에 근거한 주체와 인권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 by 박남희, 세창출판사

몇 년 전에 TED에서 행복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하버드대학이 70년 넘게 연구한 행복의 비결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추적 관찰한 결과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돈이나 명예, 건강 등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결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몇 명의 사람이 있을 때였습니다. 나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명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렇게 인간관계는 중요하지만,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대 도시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살아도 외롭고, 행복에서는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에 추가로 우리 사회에서는 집단주의적인 가치가 더해집니다. 개별적 존재자인 개인을 특정한 집단의 잣대로 규격화합니다. 그것은 교육이 될 수도 있고, 전통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가치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동일성의 논리로 사람을 재단하고, 여기에서 포함되지 않는 소수를 배제하거나 무시합니다. 전체주의 사회의 폐단을 높은 자살률과 음주율이라고 주장했던 니체의 말처럼 지금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다수에서 벗어난 소수의 사람들을 자살과 술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체의 모든 구성원이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을 전체성이라 한다면, 전체 속에서 남과 다른 자신의 고유성을 인식하는 것이 주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체성이 없다면 전체 속에 매몰된 존재일 뿐이고, 주체성을 회복할 때 개별적 존재로서의 존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성의 배경이 되는 개별적인 차이를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는 배제하고, 적대시합니다.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차별하고 억압합니다. 자기들의 전체성을 무너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철학을 레비나스는 들고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각각의 존재이고, 자기와 다른 존재를 소외시키거나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환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차이성’에 근거한 존재자. 일종의 윤리 철학에 가까운 레비나스의 철학을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인권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레비나스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합니다.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존재’가 있고, 개별적 존재로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자’가 있습니다. 집단 동일성 안에서 정체성을 망각하고 권리와 책무를 잃어버린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대치 불가능한 개별적 ‘존재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그런 까닭에 레비나스는 존재자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자기가 자기로 되는 책임을 지는 존재자로, 즉 나만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주체로의 전환을 시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즉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타자를 통해서 내가 주체가 될 수 있고, 타자와의 차이가 나의 주체성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들과 다르고, 나와 다른 남들이 존재할 때 나는 개별적 존재자가 되고, 내 고유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복제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집단속에 매몰되지 않은 개별적 존재자가 되기 위해서 나와 다른 타자가 필요합니다.      



내 정체성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타자와의 차이입니다. 타자의 존재와 그 차이가 내 정체성의 근본이기 때문에 나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타자가 없다면 나는 그저 존재일 뿐, 존재자는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있을 뿐이지 개별적 주체로서의 나는 없습니다. 내가 그저 있는 존재일 뿐이라면 개별적 존엄성에 기반한 내 기본적인 권리, 즉 인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집니다. 그저 한 사회에서 언제든지 교환 가능한 단순 부속품이 될 뿐입니다. 나를 개별적 존재자로 인권을 누리게 하는 전제 조건은 타자입니다. 이러한 타자의 개념은 인권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에 대해 구별과 배제의 논리가 아닌 차이의 인정과 포용의 논리로 접근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대의를 위한다고 하면서 분열과 배제의 논리를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인권은 시선이 타자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구별하고 분석해서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지는 것이 아닌, 개별적 주체이면서 내 존재의 전제 조건인 타자에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그 타자가 소수이고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배척하거나 혐오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흑인이 그랬고 여성이 그랬듯이, 지금의 성소수자가 그렇고 외국인 노동자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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