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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마 Jun 14. 2023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아마 나는 누구인가보다 더 적절한 질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과연 나는 무엇인가? 나를 만드는 건 무엇이고 나는 어떤 고유한 자아를 지니고 있으며, 나의 진정한 주체성이나 나를 남들과 다른 존재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런 질문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고유한 나만의 자아는 존재하는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은 유일한 존재성을 지니는 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 같은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입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이것은 맞지 않는 질문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것은 내 의지나 나의 어떤 노력이나, 내 자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했어요. 성경에도 옹기장이가 무슨 그릇을 만들지 결정하지, 옹기는 결정할 수 없다고 했어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미 태어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더 정확한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의 주체성을 찾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질문을 하는데 나의 정체성이나 주체성, 자아의식은 사실은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사회에서 과거부터 형성된 문화나 사상, 교육체계, 시대적 가치나 역사적 흐름 같은 것들을 배우고 익힘으로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정체성, 나만의 자아가 성립되는 것이죠.

가까운 예로 저는 1970년대에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12년 동안 교육을 받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교육받은 내용에 근거하여 나의 생각이나 사고 체계나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그 시대만이 가진 가치나 그 시대적 정신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지금의 내 세계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사는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의미와 가치, 조건과 위치가 내 의지와 동기이고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중년이 넘어서 어느 순간엔가 그럼 나는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아등바등 붙잡고 살 이유가 있었는가?’ 탄식하는 순간이 옵니다. 왜냐면 사회적 가치나 조건, 명예나 자리, 이런 것들은 사회적 구조나 환경이 변하면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거든요. 옛날에는 중요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 내가 늙고 나면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인생을 진짜 원하고 바라지 않는 것에 허비하며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후회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것들이, 내가 추구해온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정체성이나 나의 주체성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과 정체성은 굉장히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사실 그런 것들은 사회적 가치, 역사, 교육, 국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이런 것들은 결국 멀리 보면 의미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 봤을 때는, 그 당시에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리서 보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길게 보면 ‘그건 내가 아닌데 내가 왜 그거에 그렇게 목숨을 매고 살았던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탕달은 사람의 성격은 혼자 있을 때는 절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타인에 의해 외부에 의해 형성되는 게 곧 나이고 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그럼 나는 외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밖에는 안 되는 건데. 그럼 결국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내 속에 있는 자기 동력적인, 외부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내적 동기에 의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했을 때, 진정한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노동이 됐든 예술이 됐든, 뭐가 됐든 스스로의 동기에 의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들이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이고 특별한 존재가치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이것도 완전한 의미에서는 내가 아니겠죠.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내가 형성됐고 만들어졌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내 스스로 발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없이는 사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내가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떤 것을 바라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찌 됐든 내 속에서 나온 동기로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외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와 스스로의 나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둘 사이의 괴리(데리다가 말한 결절)를 메우고 봉합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나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위한 삶이 아닌가 합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기존 사회의 가치관이나 역사, 교육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유령 혹은 관념론)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사고할 수 없고, 개선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고, 뭔가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유령을 인정하되,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고 벗어나야 합니다. 한편으로 유령이 있음을 알게 한 것도 유령이니까. 마르크스가 말한 유령은 우리 시대의 가치관, 절대시하는 모든 사고 체계와 세계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한없이 끌어들이는 늪같이 계속 나를 그 속에서 못나오게 하지만, 유령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유령이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그것을 딛고 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진정한 나의 정체성과 자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여러 철학자나 학자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실천력이 있는 삶, 앎에 머무르지 않는 삶. 그것이 결국 나의 주체성이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며, 나는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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