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양에서 유아세례 받은 기독교인

나를 만나기 전의 남편

by 남쪽열매

여기서 나를 만나기 전의 남편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 유아세례 >


평양에서 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았다.

유아세례는 개신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식으로, 신앙이 있는 부모가 아이를 믿음 안에서 키우겠다는 의지로 대체로 첫돌 전후에 부모품에 안겨 세례를 받는 것이다.


신앙심 깊고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종갓집 맏며느리셨던 어머니와 남동생 등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남편은 당시 5년 제인 중학교를 나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교사, 기자 그리고 아버지 회사에서도 일을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고등학생인 하나뿐인 남동생이 공산당에 잡혀갔다.

사업체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부자 지주 기독교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 후, 동생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총살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즈음 평양에 본사를 두고 인천에서도 사업체를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공산당의 주목을 받아 더욱 위험해졌다. 결국 어머니의 강한 권유로 만주로 피신하시게 되었다. 나의 남편은 장손인데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드린다고 아버지 따라 만주로 피신하지 않고 평양에 남았다. 그 후에도 장손이 걱정되어 만주로 오라는 아버지의 계속된 권유를 어머니가 걱정되어 들어드리지 않았다.


그 후, 공산당은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교회 가는 길에서 몰래 지키고 있다가 교인들을 붙잡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주일에도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작전하듯 몰래몰래 교회에 모여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 옥에 갇히다. >


그러다, 남편도 잡혀가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잡아온 사람들을 좁은 감옥 안에서, 앉은 채 두 무릎을 세우게 하고는 물건처럼 차곡차곡 포개어 앉게 했다.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국군과 연합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왔다.

남편이 갇혀있던 감옥에, 먼저 남쪽으로 피난 가서 국군이 된 친구와 그 부대가 왔다.

그들은 감옥을 탈환해서 갇혀있던 이들을 다 풀어 주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남편은 서둘러 어머니께 달려가서 같이 피난 가자고 했다. 국군인 친구도 어서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 1.4 후퇴와 피난길 >


장손며느리인 어머니는 남편이 없으니, 본인이 집을 지켜야 한다며 아들만 피난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때를 역사는 1*4 후퇴라고 한다.

남편은 어머니의 확고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혈혈단신 남쪽으로 오는 마지막 배를 타게 되었다. 배가 인천에 도착하자 서울에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피난을 오게 되었다. 25세 청년의 몸으로.


< 그리움 >

아버지가 두고 가신 금시계를 아들에게 건네주시며 "잠시 피했다 오너라"라며 "어서 가라."라고 강권하시던 어머니가 늘 눈에 선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남편은 명절이나 생일 등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며 목이 매인다. 아마도 홀로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이리라.


남편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배에서 고향 마을 쪽에 폭탄이 크게 터지는 것을 보았단다.

아마도 그때 어머니와 친척들이 다 돌아가셨을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부산에서의 피난시절)


부산에서는 광안리해수욕장 바닷가에 피난민을 풀어놓았다. 그 후, 피난민들은 거기서 모두 배급받은 가마니 한두 개씩으로 겨울을 나게 되었다.


남편은 영어도 잘하고 운전도 할 줄 알았다. 미군부대에 취직해서 3개월째 근무하며 그 봉급으로 피난 와서 만난 지인 가족들을 도우며 함께 지냈다. 그들은 대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가 고등학생까지도 군인으로 차출하는 공고문을 보았다. 남편은 어린 고등학생까지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군 생활 5년)


'내 고향은 내가 먼저 지킨다.'는 마음으로 그날로 자원입대했다. 그 후 제주도에서 겨우 1주일간 훈련받고 강원도 양구로 바로 배치받았다.

5년간 전방 강원도 양구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전투를 치렀다.


그때 훈장도 여러 개를 받았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살아남은 결과였다.

남편이 전투에 나가기 전날 종종 꿈에 어머니를 뵈었다고 했다. 그런 날은 늘 전투가 치열해서 사상자가 많이 났단다.


남편과 소수만 살아 돌아오거나, 어떤 때는 남편 혼자 살아온 날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날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감사하며 또 함께 남편을 따르며 용감히 싸웠던 전우들을 추모하며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남편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한 번은 폭탄에 흩어진 사상자의 뜨겁고 커다란 살점이 남편의 허리에 척 들어붙어 화상을 입었다. 잘 떨어지지도 않아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래서 제법 큰 흉터가 남아있고 평생 신경통으로 고생했다.

결혼해 보니 허리뿐 아니라 온몸이 너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밤마다 내가 팔다리를 주무르고 두드려야 겨우 잠이 들곤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자란 후에도, 아이들이 교대로 아버지의 팔을 주무르고 다리를 두드렸다. 발로 밟아야 할 때도 있었다.


최전방에서 국군으로 지내던 시절,

남편은 전쟁이 끝나면 누구보다 먼저 고향땅을 밟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장교를 달아준다는 것도 거부하고 특무상사로 전투를 치렀다. 소대장이 제일 앞에서 진격하다 바로 총에 맞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5년을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고향 아래에 휴전선이 그어졌다. 너무나 허탈했다고 했다. 이제는 눈물을 머금고 제대해야 했다.

결국 또, 실향민이 된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어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는 마음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장교가 "같이 미국으로 가자."제안을 진지하게 했는데도 거절했다.


(실향민)

그러고는, 피난 와서 만난 고향 친구와 몇 명의 고향 친척이 있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제대할 때 대장과 전우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약간이지만 감사한 전별금을 주머니에 넣고.


남편의 손에는 화랑무공훈장 등 3종류의 훈장과 증서가 들려있었으나 어머니를 볼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화랑무공훈장만 작은아들이 보관하고 있고 훈장 두 개는 녹이 슬었다.


< 대쪽 같은 그의 신념, 애국심 >

​남편은 세월이 흐른 뒤,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다시금 인정받기도 했다. 본래 1954년에 화랑무공훈장과 증서를 받았으나, 훈장이 낡았거나 분실된 이들을 위해 1997년 정부에서 이를 새로 발급해 준 것이다. 이후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참전용사증서와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았다.

​언젠가 정부에서 "국가유공자 증서가 있는 분들은 신청 시 혜택을 주겠다"라고 공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신청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혜택을 받으라고 권유할 때마다 남편은 대쪽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스스로 일해서 벌어야지, 나랏돈을 받으면 나라가 힘들어져!"


​오직 나라를 살려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입대하여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사람. 그는 이제 제2의 고향이 된 부산에서, 오직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나라가 잘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 신념을 증명하듯, 그는 80세가 될 때까지 직장을 놓지 않고 묵묵히 일터를 지키며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