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빠의 가슴에 닿은 작은 손

시련을 잊고 다시 선 40세의 남편

by 남쪽열매

이런 신앙적 배경이 있던 남편이 겪은 교회에서의 전 재산 2700만 원의 손실과 사기당한 경험은 큰 충격이었다.


(새로운 도전)

그러나 남편은 정신을 가다듬고 국제시장에서 다시 재기를 노리기로 결심했다.

평양 고향 집을 기억하며 정성껏 지었던 큰집을 팔았다. 그 돈으로 보수동 주택가 초라한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고 국제시장 1공구에 싼 가게를 얻었다.

거기서 와이셔츠, 넥타이와 란제리 등의 의류 도매를 시작했다.


(막내아들)


그 와중에 나에겐 새 생명이 찾아왔다.

남편은 내가 막내아들을 낳는 날도 잊어버릴 정도로 사업에 몰두했다.

남편은 출산일 한 달 전에 거래처인 광주로 내려갔는데 출산일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 대신, 시골서 올라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남동생과 병원에 갔고, 무사히 막내아들을 출산했다. 참 잘생긴 아이였다.


남편은 예정보다 한참 늦게 돌아왔다. 광주 간 지 35일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생활비를 추가로 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의 출산일도 잊어버리고, 오직 일에 만 몰두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쌀뒤주에 쌀을 한 가마니씩 사놓고 먹었다. 출산했는데 남편이 오지 않았고 쌀도 떨어졌다. 나는 돈이 없어서 일 돕던 아이에게 한 되씩 양동이에 사 오게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이 목표했던 수입을 달성한 것에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남편은 양손에 커다란 돈 가방과 옷 가방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남편은 대문을 열어준 일하는 아이에게서 나의 출산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는 그 순간 너무 놀라 양손에 든 가방을 털썩 땅에 떨어뜨렸다.

방에서 산후 몸조리하던 내 귀에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온 남편은 나에게 너무나 미안하다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막내를 안으며 무척 기뻐했다. 그때 아빠 품에 안긴 생후 5일 된 막둥이가 아빠 가슴에 그 작은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남편은 아이가 자기를 아빠로 알아본다며 너무나도 감동하며 좋아했다. 그렇게 좋았을까?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편의 사업 계획과 두 번째 성공)


남편은 목표가 있었다.

특히 그 해에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200만 원을 벌어야 한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고는 새로운 사업 방안을 연구해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대성공이었다!


일단 광주 충장로에 남편이 머물 숙소를 정해 내려갔다. 남편이 거래하려는 곳은 광주 충장로 1가에서 5가에 있는 소매 상가들이었다.


광주 지리와 충장로 시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한 명 고용하고, 그와 함께 소매상들을 찾아가 필요한 물건을 주문받았다.


그 당시에는 부산에 공장들이 거의 다 있었다. 부산에서 공급할 수 있는 물건들을 잘 아는 남편이 광주의 상인들에게 장사가 될만한 품목들을 제안했다.

와이셔츠, 넥타이, 머플러에 양말, 그리고 란제리와 손수건까지 남녀 의류 생필품을 모두 제안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주문을 받아 부산에 와있던 내 남동생에게 남편이 연락하여 주문 내용을 말한다.

내 동생이 남편이 거래하는 공장에 가서 주문한 후, 공장에서는 제품을 만들어 남편이 있는 광주 숙소로 물건을 보냈다.


광주에서는 고용된 직원이 주문 장부를 가지고 남편 숙소로 보내진 물건을 배달하고 수금도 해왔다.


그 당시 광주는 부산보다 많이 낙후되어 있어서 남편이 보내는 물건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리고 남편 통해 주문이 계속 밀려 들어오니 공장들은 남편을 크게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물건을 공급했다.


똑똑하고 일 잘하고 열정적이었던 선량한 남편은 다시 열심히 노력하여, 이사한 지 3년 만에 사업을 이전보다 더 크게 일구었다.

돈도 많이 벌어 그 동네에 집을 사서 거기에 2층 양옥집을 지었다. 남편은 다시 성공한 사업가가 된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들)


그때는 남편이 40세, 내가 35세가 되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9살 아들, 7살 딸 그리고 4살 막내아들이 착하고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라고 있었다.


남편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나, 단단한 몸집에 코도 우뚝하고 눈이 총명해 보였다. 그는 늘 자신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형사같이 보인다고도 했다. 한 번은 멋모르고 해코지하려던 깡패들이 그 기세에 놀라 오히려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의 바르고 인품이 좋은 착한 사람이고 맵시도 좋아서 영국 신사라고 불렸다. 점잖고 멋쟁이인 남편에게는 친구도 많았지만, 의지하고 덕을 보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았다.

사업에 관련된 사람들도 여럿 있었지만,

내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막내아들을 낳은 그다음 해에, 언니의 간절한 요청으로 언니의 큰아들이 장사를 배운다고 부산으로 올라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직 새집도 짓기 전 전셋집에서 살 때이다. 아이 셋과 남동생에 일하는 아이가 같이 살던 중에 조카까지 돌보아야 했다.


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착하고 신앙심 깊은 남편의 처사였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카의 부산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