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빼라고? 말라고?
"아빠 살 빼."
작년 봄이니까 4~5월쯤이었던 것 같다. 거의 늘 집에 있기에 첫째 딸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나였지만 아내가 만삭의 몸일 때라 이 때는 조금 더 많은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어린이집 등 하원도 거의 내가 하고 밤에 잠도 같이 잤다. 아이가 한참 말도 확 늘던 시기라 하루하루 많은 대화를 하곤 했다. 이날도 평소처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어린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차 안에서 아이가 갑자기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별생각 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왜 그랬으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갑자기 왜? 아빠 날씬했으면 좋겠어?"
"응. 아빠가 뚱뚱하면 빨리 달릴 수 없잖아. 날씬해야지 빨리 뛸 수 있고 그래야 내가 위험할 때 빨리 와서 구해주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우선은 아이가 날씬하다는 단어를 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리고는 꽤나 그럴싸한 논리로 아빠의 다이어트를 자극한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씁쓸하다고 하면 조금 과한 것 같고 약간 섭섭하다 정도 려나. 어쨌든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에게 뚱뚱한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구나..'
혹시라도 누군가의 외모를 비하하는 듯한 말을 아이 앞에서 한 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고도비만인데 뚱뚱한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냥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봤을 때 그냥 살 많은 아빠는 굼떠 보인다는 뜻으로 생각됐다. 다른 어떤 사람이 내가 뚱뚱하고 느릿느릿해 보인다는 말을 했다면 그동안 먹은 치킨과 삼겹살을 생각했을 때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갔을 터였다. 문제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내 딸이라는 것과 아이의 말속에 담겨있는 믿음직스러운 아빠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운동회에 따라가서 아이를 안고 뛰거나 아빠 달리기를 해서 상을 받아주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학부모가 참여하는 행사가 없어진 지금은 더욱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그런 순간이 온다면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기 위해서 나름 꾸준히 운동을 했다. 그리고 원래 운동을 좋아하기도 한다. 술, 담배도 안 하고 친구들도 거의 안 만나다 보니 집-일-운동의 꽤나 단조로운 패턴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또래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아이의 말을 통해 나는 비슷한 나이대에 비해서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 뿐이지 실제 체력이나 건강 상태가 아이를 오랫동안 제대로 돌봐줄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다. 어쩌면 '이 나이에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을 뿐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30대 초반의 나와는 평소에 먹는 영양제의 수도, 병원을 찾는 빈도도, 그리고 건강검진을 기다리는 마음가짐도 다르다. 이런저런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을 때마다 이미 10년도 넘게 들어온 말이 '살 빼세요'다. (이쯤에서 조금 이상한 건 10년 전쯤의 나는 지금의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몸무게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때도 살 빼란 소리를 늘 들었던 걸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새해가 될 때마다, 여름휴가가 다가올 때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다이어트란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 살 빼야 지란 다짐을 하곤 했고 그 횟수를 세어보면 아마 100번은 족히 넘을 듯하다. 사실 다짐이라는 말을 쓰기도 조금 민망하다. 그저 조금은 무기력한 마음의 소리로 '아... 그렇지.. 살 빼야지. 빼면 참 좋을 텐데...'라고 읊조리며 그날 저녁에 뭐 먹을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어느 날에는 평소보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주문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문한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버리지 않고 다 먹은 일은 거의 없다. 특히 고구마... 특히나 아빠가 된 이후에는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을 거의 접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육아를 하고 아이 먹을 거 챙기면서 운동이나 식단관리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쳐도 너무 관리를 안 했나 라는 생각을 품은 채 저녁때 집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다시 한번 아빠가 살 뺐으면 하는 이유를 물으니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은 아닌 게 확실해져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다이어트에 대한 목표를 다시금 꺼냈다. 만삭의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당장 시작을 할 수는 없었다. 마음속으로 적당한 타이밍을 보던 중 아이가 둘째가 어느 정도 커서 하루 일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시기가 왔다.
그렇게 난 2022년 11월 경에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하지만 혼자 일 때처럼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는 없었다. 육아도 그렇지만 일도 해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혹시라도 온갖 시간을 들였는데 다이어트를 실패했을 때의 상황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다이어트는 성공 확률이 0% 였으니까. 그래서 하루하루 다이어트에 쓰는 시간이 적으면서도 효과가 확실해 총 다이어트 기간이 길지 않을 만한 방법을 찾았다. 확 굶어버리는 것이 이 조건에 잘 맞긴 했지만 당연히 옳지 않은 방법이었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난 종종 저혈당으로 고생을 했기에 오래 굶으면 큰일 난다.) 적당히 운동을 하고 적당히 식단을 조절하기로 하고 운동을 시간 대비 칼로리 소모가 높다는 크로스핏을 선택했다. 식단은 보통 생각하는 정석 다이어트 식단으로 현미 + 지방기 없는 고기 + 야채를 위주로 구성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나니 정작 딸이 많이 아쉬워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 둘이 간식을 보면서 노는 시간을 자주 가졌는데 갑자기 간식을 안 먹겠다고 하니 살짝 섭섭해하는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살을 빼기 위해서라는 말에 금세 수긍하고는 조금은 재미없지만 혼자 간식을 챙겨 먹었다. 지금은 반대로 어떤 먹거리가 있으면 이거 먹어도 되는 거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아이의 생각이 내 예상보다는 훨씬 커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그렇게 2달 남짓 지난 지금 10kg 정도 감량에 성공했다.
체지방률도 정상 범위로 들어오고 있고 내장지방 수치 등은 이미 정상에 들어왔다. 인바디 결과로는 내 나이대 상위 15% 정도에 걸려 있다. 그런 수치들을 보지 않더라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고 건강해졌다는 걸 느낀다. 아이가 얼마만큼의 기대치를 품고 나에게 "살 뺐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던진 건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수십 번은 실패한 다이어트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걸 보면 아이의 말이 주는 무게가 참 대단하긴 한가보다. 평일에는 거의 매일 같이 1시간가량 운동을 했고 설 연휴와 몇 번의 허락된 치팅데이를 빼고는 식단도 빼먹지 않은 걸 보면 나름 잘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말 한마디 때문에 굳은 다짐을 해서 살을 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건강을 챙길 필요가 있다고 느끼던 시기에 다이어트를 할만한 심적 여유가 생겼을 때 나에게 맞는 적당한 방법을 만났고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이어트가 꾸준히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만 성공을 허락한다는 점을 볼 때 매일매일 보는 아이의 얼굴이 은은한 자극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아빠가 힘든 회사 생활을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티는 같은 것과 얼추 비슷한 느낌으로 운동을 나간다. 놀이터든 차도든 아이가 위험해질 때 잽싸게 나타나서 아이를 구해주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거기에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조금 더 많은 걸 알게 됐을 때도 건강한 모습의 아빠로 남아 있으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하면서도 어쩌면 조금 당연한 생각이 힘을 더 보태준다. 이왕이면 시간이 몇 년 후 어느 날 학교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딸아이를 기다릴 때 친구들한테 자랑거리인 아빠이길 바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려면 분식집이든 햄버거 집이든 같이 가서 먹어줘야 될 것 같아 더욱더 빨리 다이어트를 끝내야 할 텐데 이게 끝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먹다가 갑자기 아빠 살 왜 빼냐고 딸이 물어보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