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아파트 놀이터에는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살던 때를 돌이켜보면 아파트 단지 안이든 근처 공원이든 늘 뛰어노는 아이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 짐작했다. 어릴 때부터 학원 순례가 시작되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짐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 예상보다 놀이터에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안심이 되었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가 그린 ‘비너스에 대한 경배’라는 작품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비너스가 아니라 화면을 가득 채운 아기 큐피드들이다. 정확히 모르긴 해도 이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큐피드가 많이 등장하는 그림이 아닐까.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장난치고 있는 큐피드들을 보고 있노라면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떠오른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는 마치 기습을 당한 듯했다. 장엄하고 엄숙한 고전회화들을 연달아 감상하느라 다소 표정이 굳어져 있었는데 불쑥 눈 앞에 나타난 이 그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 그 사과를 이리 던져, Pass! >
< 사과 던진다, 잘 받아~ >
< 사랑의 화살, 피할 것인가, 맞을 것인가 >
포동포동 살이 오른 큐피드들은 사과나무가 있는 정원에서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 수많은 큐피드들이 땅 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가운데 조그맣게 솟아있는 날개를 이용하여 나무 위의 사과를 따고 있는 큐피드도 있다. 정신없이 큐피드들이 뒤엉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두 명씩 짝을 지어 놀고 있는 큐피드들도 많다.
화면 우측 하단의 큐피드가 땅에 떨어진 사과를 막 집어 들고 있고 왼쪽의 큐피드는 그 사과를 받으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패스!’라고 외치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지 않는가. 화면 좌측에도 캐치볼(캐치 애플?)을 놀고 있는 듯한 큐피드 둘이 있다. 나무 위의 큐피드가 오른손을 치켜들어 사과를 던질 채비를 하고 있고 그 아래쪽에는 양손으로 이 사과를 받으려는 다른 큐피드가 있다.
대부분사과에 정신이 팔려있는 와중에 치명적인 무기를 들고 있는 큐피드도 있다. 화면 우측 화단을 보면 사랑의 화살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큐피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겨냥하고 있을까. 화살 끝을 따라 가보면 화면 좌측에 놀란 듯이 양손을 치켜들고 있는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1초 후의 장면이 궁금해진다. 속절없이 맞을 것인가, 아니면 재빨리 피할 것인가.
< 날아오를 날개가 없는 지 나무를 기어오르는 큐피드와 멜랑꼴리한 큐피드 >
다들 즐거워 보이지만 안쓰러워 보이는 큐피드도 있다. 하단 중앙에 홀로 앉아있는 큐피드는 우울하고 고독해 보인다. 친구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일까. 좌측을 보면 사과나무를 기어올라가는 듯한 큐피드도 있다. 이상하다. 다른 친구들처럼 날아올라 사과를 따면 될 텐데 왜 힘들여 올라가는 것인지. 혹시 아직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날개가 충분히 자라지 않아서일까. 누군가 이 아기에게도 다정하게 사과를 건네주면 좋겠다.
- 숭배의 대상을 한 쪽 구석으로 몰아넣은 대담한 구도
이제 귀여운 장난꾸러기들 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전체 구도를 보자. 큐피드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비너스 상은 오른쪽 끝으로 밀려나 있고 풍경의 소실점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티치아노가 활약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좌우 균형을 중요시 여겼다. 당초 이 그림을 의뢰받았던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초안에는 비너스가 중앙에 있었다고 한다. 만약 비너스가 중앙에 있다면 그 주변으로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있어도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비너스가 될 것이다.
즉 비너스를 한쪽 끝에 놓고 큐피드들을 중앙에 놓은 것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기 위한 화가의 의도이다. 티치아노를 비롯한 베네치아 화가들은 종종 이런 대담한 구도를 즐겨 사용했다. 그렇다고 이 그림이 르네상스적인 좌우 균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른쪽의 비너스 상에 맞춰 왼쪽에는 커다란 사과나무와 하늘을 날아오르는 큐피드들을 배치하여 적절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이 ‘비너스에 대한 경배’인 이유는 비너스와 수많은 큐피드 그리고 사과에 해답이 있다. 비너스는 미의 여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큐피드는 비너스와 마르스 사이의 아들이다. 마지막으로 사과는 자연의 비옥함을 상징한다. 즉 이 그림 속의 수많은 아기 큐피드와 사과는 다산에 대한 찬양, 비너스에 대한 경배인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비너스 보다는 천진한 아이들에게 경배를 바치고 싶어 진다.
- 아이들은 진지하고 어른들은 흐뭇하고
< 메리 커셋 –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 >
이번에는 인상파 화가가 그린 아이들을 보자. 미국의 대표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인 매리 커셋(Mary Cassatt)의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란 그림이다. 큼지막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는 아이 두 명이 한참 모래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데 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신기한 존재이다. 누군가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짓게 되지만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에는 웃음이 나오다니. 웃는 모습을 봐도 웃음이 나오고 진지한 모습을 봐도 웃음이 나오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아이들은 그것을 수월하게 해 낼 수 있다니 부럽다.
아이들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자. 모래 놀이의 필수 장비인 삽과 양동이를 잡고 있다. 생각해보면 모래 놀이는 마인 크래프트와 비슷하다. 모래와 바닷물과 삽과 양동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 두 아이의 머릿속에는 어떤 설계도가 그려져 있을까.
화면 왼쪽에서 삽과 양동이를 잡고 있는 아이는 볼이랑 두 팔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앙증맞다. 티치아노가 그린 큐피드도 그렇고 매리 커셋이 그린 아이들도 그렇고 포동포동함은 귀여움의 원천이다. 섬세한 색깔 변화와 관절 부분에서 접히는(?) 살의 묘사가 아이 피부의 질감을 생생히 살려주고 있다. 오른쪽의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와 왼쪽의 삽을 들고 있는 아이는 비스듬하게 앉아 자기만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두 아이들 사이에 심리적 거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밀함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 동생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언니의 붓끝
< 메리 커셋 - 자화상 >
매리 커셋은 19세기에 활동한 미국화가이다. 부유한 금융가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매리 커셋이 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예술가가 되려는 자식을 반대하는 부모는 과거나 지금이나 수 없이 많다. 반대 이유는 보통 세 가지 중 하나이다. 자식에게 재능이 없거나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소위 집안의 체통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매리 커셋은 재능이 있었고 집안은 부유했다. 그녀의 부모는 집안의 체면을 내세운 것 같다. 부모의 반대는 집요했으나그녀는 부모가 그려주는 확실한 미래보다 스스로 그려나가는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했다. 매리 커셋은 당시 세계 예술의 수도였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동안 드가와 친해지게 되었고 프랑스 출신의 또 다른 여성 화가인 베리스 모리조와도 친분을 쌓는다. 그녀의 말년은 베토밴을 떠올리게 한다. 시력을 잃게 된 것이다. 신체의 어느 한 부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왜 하필 작곡가인 베토밴은 청력을 잃어야 했고 화가인 매리 커셋은 시력을 잃어야 했을까. 그녀는 1926년, 수많은 예술가와 교제했던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이제 다시 한번 그림을 보자. 그림 속 아이들은 누구일까? 매리 커셋은 이 아이들이 누구인 지 명확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을 매리와 리디아 자매라고 추측한다. 매리는 여동생인 리디아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그녀는 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매리 커셋은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 6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사전 정보 없이 이 그림을 보면 화가가 자신의 자녀를그린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참고로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흐뭇한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사망한 동생과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의미에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한 방울의 눈물을 동반하는 그런 미소 말이다.
- 꺄르르 웃고 떠들고. 아이처럼 즐거운 부기우기 연주
< 레 프레레, Piano Breaker 앨범 표지 >
아이들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악기는 무엇이 있을까.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모습에는 하프의 꿈꾸는 듯한 음색이 잘 어울릴 것이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에는 피아노가 적격일 것이다. 통통 튀어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경쾌하게 두드리는 건반 소리와 잘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의 피아노 연주자 중에 레 프레레(Les Freres)라는 듀오가 있다. 레 프레레는 프랑스어로 형제라는 뜻인데 단어 그대로 형제듀오이다. 이들의 음악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째 연탄 연주, 즉 한 대의 피아노를 두 명이서 함께 연주한다. 둘째 부기우기를 기반으로 한다. 부기우기는 재즈 초기에 유행한 형식이다. 왼손으로 저음부 리듬을 반복하는 동안 오른손은 멜로디를 화려하게 변주한다. 좌측에 리듬, 우측에 멜로디를 거느리고 스트레이트 하게 연주하는 부기우기는 마치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구름 속을 내달리는 것 마냥 거침없다.
레 프레레의 연주곡 중에 “For Kids”라는 곡이 있다. 부기우기답게 반복되는 리듬과 멜로디 변주를 장착하고 신나게 방방 뛰어노는이 곡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잘 어울린다. 동요의 대착점에 서 있는 듯한 부기우기라는 장르로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음악을 만들 수 있다니. 유튜브에는 레 프레레가 유치원을 방문하여 정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 속에서 이 곡을연주하는 영상이 있다. 아이들 소리 때문에 연주가 깨끗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점이 오히려 이 곡을 더 매력 있게 만들어준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소리가 음악이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훌륭한 음악임에 분명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