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한 여인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질문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이다. 흔히 출신지인 막달라와 함께 표기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의 주인공은 단연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시선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 가보면 다른 측면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첫 만남부터 보자. 그림 가운데 그리스도가 앉아있고 왼쪽에 마리아가 있다. 멀리 덩굴 그늘 밑을 보면 언니인 마르타가 물동이를 들고 오고 있다. 식사에 앞서 시원한 물 한 잔을 대접하려는 것 같다. 그리스도는 한 마을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만났고 자매의 식사 초대를 수락한 상황이다.
마리아는 감히 그리스도 옆에 앉을 수 없기에 바닥 위 양탄자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순수한 여인을 자상하게 내려다보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시선과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그리스도의 시선은 이후에도 반복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에는 존경이 가득하다. 그를 향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 당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다니
< 대 루카스 크라나흐 - 십자가형 >
<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올려다보는 마리아 >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마리아는 이제 골고다 언덕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장에 와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는 십자가의 밑동을 끌어안고 슬픔에 잠겨 있다. 롱기누스의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에 박힌 양손, 양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선혈이 곧 그녀의 두 볼에 방울져 떨어질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시선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리스도의 시선이 교차한다. 사랑하는 이가 조롱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간신히 뜨고 있는 실눈으로 슬퍼하는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그리스도의 심정은 또 얼마나 뭉클했을까. 이제 자신의 곁에는 베드로도 야고보도 없는데.
- 두 번 다시 못 만날거라 생각했는데
< 코레조 - 나를 만지지 마라 >
세 번째 장면으로 옮겨갈 차례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마리아 앞에 다시 나타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엄청난 스토리로 가득 찬 성경에서도 손꼽히게 감동적이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자신을 키워준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자기를 따르던 열 두 제자들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 막달레나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죽어가는 자신의 발 밑에서 슬퍼하던 그 여인 말이다. (이 부분에서 세상의 어머니들은 괜스레 서운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가 안치된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그리스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천사 둘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것만으로도 너무 슬픈데 시신마저 사라져 버리다니. 극심한 슬픔 속에서 무덤 밖으로 나온 그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그리스도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 그리스도가 다가간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로 착각하고 대답한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내게 알려주세요. 제가 모셔가겠습니다.”별 다른 대답이 없는 그리스도를 뒤로 하고 슬피 돌아서는 그때, 그녀의 등 뒤로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리아야.” 어떻게 동산지기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을 향해 뒤돌아보는 순간, 드디어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아본다! 그녀는 감격하여 소리친다. “*라뽀니!”
*라뽀니 : 히브리어로 ‘선생님’이란 뜻이다.
이 장면은 너무나 극적이고 감동적이라 아직까지 로맨스 드라마에서 종종 변용되고 있다. 그와 늘 같이 웃고 떠들던 까페 앞. 그와 영영 헤어졌다는 슬픔에 펑펑 울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이제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겠지...'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멈출 수가 없다. 그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울고 있어?”
"...!"
터질듯한 심장을 억누르고 뒤돌아보는 그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의 품에 와락 안기는 그녀의 모습. 이 아름다운 드라마 장면의 원형이 바로 요한복음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너무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만지려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오른손으로 다가오려는 그녀를 저지하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난 아직도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여기서 세 번째로 마리아의 올려다보는 시선과 그리스도의 내려다보는 시선이 나온다. 언뜻 그리스도의 시선은 매정해 보이고 마리아의 시선은 어리둥절해 보인다.
하지만 한 번 더 시선의 의미를 되짚어보자. 그리스도의 눈빛은 지상에서 마리아에게 주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마리아야, 나를 만질 필요 없다. 나의 부활을 눈이나 손끝으로 확인하려 들 지 마라. 네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감각’이 아니라 ‘영성’이다. 마리아도 눈 빛으로 답변한다.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의 뜻을 헤아리겠나이다.”
-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나요
< 라 투르 - 촛불을 바라보는 마리아 막달레나 >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그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 고요한 밤, 홀로 앉아 촛불을 바라보고 있다. 만남, 이별, 재회.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어마어마한 사건들은 다 지나갔다. 마리아의 무릎에는 해골이 놓여있다. 유한하고 덧없는 인간의 삶을 나타낸다.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촛불은 영성을 상징한다. 촛불이 밤의 한기와 어둠을 몰아내듯 영성은 마음속의 욕망과 집착을 걷어낸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올랐던 질문에 빠져있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나요?”
- 화가의 특기가 드러나는 다양한 마리아의 모습
< 생생한 여름 정원의 정경 >
첫 번째 그림을 그린 화가는 헨릭 시미라츠키(Henryk Siemiradzki)이다. 폴란드 화가이지만 주로 로마에서 활동했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카데미파 중 한 명이다. 그림의 제목은‘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한 낯의 정경이 너무나 생생하여 그림 속 마리아 옆의 꽃 향기가 콧가에 어른거리는 듯하고 그늘의 서늘함이 피부에 닿는 듯하다.
< 'ㄷ'자 구조의 놀라운 입체감과 크라나흐 >
십자가 형장을 처절하게 그려낸 두 번째 작품은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의 ‘십자가형’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532년에 완성되었다. 크라나흐의 그림은 얼핏 투박해 보여 화가의 기술을 알아채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역시 대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십자가형’의 구도를 보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두 명의 도둑들이 ‘ㄷ’ 자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십자가 세 개를 나란히 병렬로 배치하는 구도에 비해 훨씬 어려운 기술을 요구한다. 단축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크라나흐는 완숙한 솜씨로 두 명의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직각으로 꺾어 넣었다. 3D로 변환하여 이 그림을 본다면 도둑들이 매달린 통나무가 눈을 찌를 듯이 불겨져 나올 것이다.
< 연기처럼 뿌옇게 처리한 코레조의 스푸마토 >
세 번째 작품은 코레조(Correggio)의‘나를 만지지 마라’이다. 보통 라틴어인 ‘Noli me tangere’로 표시한다. 코레조 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옮긴 주제이다. 코레조는 스푸마토의 대가였다. 스푸마토는 ‘연기 같은’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사물이나 인물의 윤곽선을 연기처럼 뿌옇게 처리하는 기술을 말한다. 스푸마토로 그린 그림은 부드러워 보이는 효과가 있다.
< 촛불 마스터, 라 투르 >
신비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마지막 그림의 제목은 “촛불을 바라보는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17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라 투르(Georges de La Tour)의 작품이다. 라 투르는 같은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그의 전매특허이다.
이 그림 속에서도 그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둠 속에서 날씬하게 쭉 뻗어 타오르는 촛불과 그 불빛 속에서 어슴프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리아는 고요하고 명상적이다. 작품만으로 보자면 라 투르는 차분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그림과 정 반대였다. 라 투르는 성격이 고약하기 짝이 없어 이웃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작품이 꼭 작가의 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드물다.
- 뮤지컬 선율에 어우러지는 마리아의 혼란과 고백
엔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중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작품이 있다. 웨버는 오페라로 치면 베르디 같은 작곡가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들에서 신들린 작곡 실력을 폭발시켰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7일을 그린 뮤지컬이다. 뮤지컬 삽입곡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은 ‘I don’t know hot to love him’ 일 것이다. 마리아는 혼란한 심정을 토로하다가 마지막에 이끌리듯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마리아는 촛불을 끈다. 완전한 어둠 속.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묻는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만 바라봐 줘. 나만 사랑해야 해." 하지만 마리아의 귓가에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대답은 정 반대이다. “나를 보지 말고 네 이웃을 둘러보렴. 나를 사랑하지 말고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그리스도를 올려다본다. 감각이 아니라 영성의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