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목소리가 선사하는 놀라운 스펙타클
각자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예술은 제각각이겠지만 마드리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예술은 분명 ‘오페라’가 될 것이다. 마드리드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극장이 있다. 왕립 극장(Teatro Real)이 그것이다. 왕립 극장. 스페인어 “Teatro Real”을 그대로 옮겨놓고 보니 단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왕립”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운 단출한 이름이야말로 이 극장의 위상을 드러낸다. 레알 마드리드를 사랑하는 축구팬은 팀 이름에 왕실을 뜻하는 “Real”이 들어가는 것이 자랑일 테고 마드리드의 오페라 팬들은 스페인에서 “Real”을 내세운 유일한 극장이 마드리드에 있다는 것이 자랑일 것이다. 참고로 스페인에는 대형 오페라 공연장이 하나 더 있다. 바르셀로나의 리세우 극장(Gran Teatre del Liceu)이 그것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오비에도(Oviedo)에는 캄포아모르(Teatro de Campoamor)라는 극장이 있다. 인구 30만 명의 작은 도시에 오페라 전용극장이 있다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서두에서 오페라는 호사스러운 예술이라고 표현했는데 오페라 입장료는 분명 비싼 편이다. 갈라쇼 형태의 콘서트나 작은 소극장에서 올리는 가족용 오페라 같은 경우는 입장료가 저렴하기도 하지만 왕립 극장과 같은 일류 오페라 극장의 공연은 상당히 비싸다. 공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해도 왕립 극장의 티켓 가격은 최하 80유로에서 최고 300유로까지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오페라 관람을 누구에게나 추천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하지만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는 분이라면 오페라를 강력 추천해 드리고 싶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대형 뮤지컬의 중간 등급 티켓 값은 120,000원 정도이다. 그렇다면 오페라 중간 이하 등급의 티켓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오페라 공연장을 직접 방문하기 부담스럽다면 인터넷으로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드리드의 Teatro Real도 스트리밍으로 오페라 감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왕립 극장은 스페인 왕궁 인근의 이사벨 2세 광장에 있다. 여행자들 숙소가 많은 솔(Sol) 광장 근처에서 왕궁으로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왕립 극장을 발견하게 된다. 왕립 극장은 1818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2018년에는 200주년을 맞이했다. 그간 왕립 극장은 두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으며 1966년에서 1988년까지는 클래식 콘서트 홀로 사용되기도 했다. 클래식 콘서트홀로서의 기능은 현재 국립 콘서트홀이 담당하고 있다. 왕립 극장은 이사벨 광장에서 보는 것보다 건너편 오리엔테 광장(Plaza de Oriente)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다. 오리엔테 광장을 둘러싸고 초승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왕립 극장이 위치해 있는데 사진 촬영하기에도 좋다.
왕립극장 내부로 들어가면 무대 입구 위에 세 개의 금속 장식이 걸려있다. 가운데 장식은 스페인 왕실 문양이다. 스페인에 있는 극장이니 왕실 문양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 공연장 자체가 스페인 왕가에서 건립한 극장이니 왕가의 문양이 걸려있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리라가 걸려있다. 유럽에서는 음악의 상징으로 리라가 자주 사용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시인이자 악사였다는 오르페우스가 연주한 악기가 바로 리라이며 구약성경 등장인물 중 음악을 사랑하기로 유명한 다윗왕도 리라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유럽 대성당을 구경하다가 리라를 들고 있는 인물을 발견한다면 십중팔구 다윗왕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왼쪽에 있는 악기가 흥미로웠다. 바로 기타이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민속음악인 플라멩코에서는 기타가 메인 악기로 사용되고 클래식 기타의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스페인 사람이다. 스페인 음악과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참고로 이 곳 왕립극장에서는 플라멩코 공연도 자주 무대에 올려진다.
극장 안은 공연 무대 외에도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공연을 즐기러 온 관객들이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또 공연이 없을 때는 각 종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일반 시민들이 칵테일 파티나 저녁 식사, 리사이틀 등의 목적으로 대여 가능하다는 애기이다. 방마다 전반적인 분위기와 그 방을 장식하고 있는 예술품의 종류는 모두 다르다. 카를로스 3세의 방은 푸른색 계통이고 ‘거울’이 메인 장식이다. 반면 베르가라 방은 붉은색 분위기가 감돌고 벽에 걸린 그림들이 아름답다. 아리에타 방은 벽면을 테피스트리로 장식하여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를 중심으로 발코니 석이 둘러싸고 있는 오페라 극장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이 넓은 공간을 오로지 인간의 성량으로만 가득 채운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콘서트나 뮤지컬 같은 대부분의 공연 예술은 마이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오페라는 마이크가 없다. 마이크 없이 순수하게 육성으로 노래하기에 관객들은 성악가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소프라노가 무대에 올라 처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하면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 퍼지는 것 같다.
왕립 극장의 첫 번째 공연작품은 도니체티의 라 파보리타(La Favorita)였다. 그 후에도 왕립극장에서는 도니체티를 비롯한 벨리니, 로시니, 베르디와 같은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가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작품은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만개하였던 벨칸토 오페라이다. 벨칸토는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Bel) 노래(Canto)이다. 미녀와 야수의 여주인공 이름이 벨(Belle, 단어 그대로 ‘미녀’라는 뜻)이고 캔 커피 이름으로도 쓰였던 칸타타(Cantata)가 ‘성악곡’이란 것을 생각하면 두 단어의 조합을 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성악가들의 화려한 기술이 돋보이는 장르라 할 수 있다. 만약 오페라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벨칸토 오페라부터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탈리아라고 하면 지금도 프랑스와 함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인 강국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이탈리아인들의 남다른 미적 감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는 음악과 미술 모두에서 서양 예술사를 주도하였다. 14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르네상스 시기에는 회화와 조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16세기부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서는 음악의 유행을 주도한다. 바로크 음악과 오페라 모두 이탈리아에서 전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상 최초의 오페라 작품인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와 현재도 상연되는 초기 오페라의 대표작품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우스 모두 이탈리아 작품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벨칸토 오페라로 유럽 전역을 휘어잡는데 이 시기에 작곡된 오페라를 들으면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 르네상스 미술을 보는 듯하다.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 첫눈에 반해버릴 수밖에 없듯이 벨칸토 오페라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멜로디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는 베르디와 푸치니가 가장 유명하고 도니체티는 ‘사랑의 묘약’,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메가 히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들 작곡가 외에 빈첸초 벨리니를 추천하고 싶다. 35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주옥같은 작품을 다수 남긴 벨리니는 노르마, 청교도, 해적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쇼팽이 벨리니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벨리니의 작품은 쇼팽의 음악처럼 섬세하고 서정적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 벨리니의 해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운 좋게도 현존하는 최고의 소프라노 중 한 명인 소냐 욘체바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소냐 욘체바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실린 벨리니의 선율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로 찾아갔을 때, 욘체바는 그 어느 아이돌 스타 부럽지 않게 많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탈리아 못지않게 오페라의 걸작을 많이 남긴 나라로는 독일을 꼽을 수 있다. 독일 오페라 중에는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등을 작곡한 모차르트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어쨌든 모차르트 역시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라면 이탈리아 작곡가에 뒤지지 않는 천재인 만큼 벨칸토 오페라만큼이나 아름다운 멜로디를 감상할 수 있다. 모차르트 외에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바그너가 있다. 바그너의 작품은 벨칸토 오페라와 달리 웅장하고 극적인 전개가 두드러진다. 만약 유럽 여행 중 바그너의‘니벨룽겐의 반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전날부터 단단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총 4부로 나눠져 있는 이 작품은 1 부당 상영시간이 약 4시간에 달하고 보통 한 번 공연에 1부만 상영한다. 4부 전체를 16시간 동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텐데 그중 1부만 완곡 감상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도전인 것은 확실하다.
독일, 이탈리아라는 오페라 양대 산맥을 제외하면 프랑스 오페라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 오페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은 비제의 “카르멘”이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투우사와 군인, 집시 여인 사이의 치명적인 삼각 관계를 매혹적으로 풀어내는 카르멘은 전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중 하나로 스페인에서도 단골로 공연되는 작품이다. 왕립극장에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18,19세기의 고전 작품들 외에 20세기 이후의 현대 작곡가의 작품도 종종 무대에 올려진다. 왕립극장 200주년 기념 음반 속지를 보면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 큰 자부심이라고 적혀있다. 20세기의 오페라도 좋은 작품이 많겠지만 오페라 마니아가 아니라면 처음 접하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오페라 관람 경험이 없는 분들을 위해 오페라 관람 매너 혹은 오페라 공연 전에 준비할 내용들을 소개한다. 일단 복장은 너무 엄격하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의 경우 연미복이나 드레스를 갖춰 입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일부 공연은 드레스 코드가 엄격하기도 하다.) 하지만 적절히 점잖은 옷을 갖춰 입는 것을 추천한다. 너무 캐주얼한 옷을 입고 공연장에 도착하면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단박에 스칠 것이다. 그리고 공연 중에는 일반 클래식 공연에 비해 좀 더 자유스럽게 박수를 치고 호응을 해도 좋다. 주인공 소프라노가 멋지게 아리아를 끝내면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브라보’와 같은 감탄사도 많이 들린다. 노래하는 중에는 숨죽여 감상하지만 곡이 끝나고 나면 아이돌 콘서트 못지않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또 클래식 공연과 마찬가지로 공연 전에는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질 경우 난감하기 때문이다.
막간 휴식시간에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복도에 나가 몸도 풀어주고 또 공연장 분위기도 즐기는 것이 좋다. 또한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는 스토리를 미리 알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공연 중 자막이 나오긴 하지만 자막을 읽느라 무대 장면을 놓치기 쉬우므로 미리 내용을 알고 가는 것이 좋다. 당일 공연장에서 공연 스토리와 출연진 등을 소개한 안내책자를 배포하는 데 공연의 감동을 배가 시키기 위해서는 시간 되는대로 안내책자를 읽어두도록 하자. 그리고 좌석은 너무 비싼 것으로 선택할 필요가 없다. 저렴한 좌석의 시야각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공연 감상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널 볼 수 있어’는 낭만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이라는 책을 보면 뇌는 감각기관들로부터 정보를 받기 전에도 나름의 실제를 산출한다고 한다. 즉 ‘눈’으로 보지 않아도 ‘뇌’로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글먼은 알기 쉬운 예로 잠자는 중에도 ‘꿈’을 통해 생생한 시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든다. 보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오페라에서 돌아온 날 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한 밤의 적막함 속에서 아름다운 아리아가 들려올 것이다. 그 음악은 잠든 후에도 꿈속까지 찾아와 몇 시간 전의 감동을 한 번 더 되살려 줄지도 모른다. 고요한 밤이 되면 찾아올 오페라의 유령, * 귀에 남은 그대의 음성.
* 비제의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