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1: 알랭 드 보통 - 불안
이상형이 하나 추가됐다.
나의 불안을 해소해 주는 사람.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성취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의 속도와 호흡을 오롯이 긍정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우리가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함이라면, 결국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의 본질은 내 안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사람'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 이의 다정한 시선 아래서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인생이 아닌, 나의 인생을 온전히 마주할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5가지 원인과 5가지 해결책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해체하여 분석한다. 마치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설계한 '불안의 알고리즘'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간략하게 불안에 대해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원인: 우리는 왜 떨고 있는가
사랑의 결핍(Lovelessness): 우리가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돈 그 자체보다 타인의 관심과 존중, 즉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지위가 낮아진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사회적 고립을 의미한다.
속물근성(Snobbery): 내면이 아닌 외적인 성취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속물들이 득세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과시의 굴레에 빠진다.
기대(Expectation):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서사는 역설적으로 무한한 비교를 낳는다. 나보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는 곧 나의 무능함으로 치환된다.
능력주의(Meritocracy): 성공은 오직 능력 덕분이며 실패는 오직 개인의 탓이라는 냉혹한 논리다. 가난이 불운이 아닌 '부끄러움'이 되는 순간, 불안은 극에 달한다.
불확실성(Dependence): 우리의 지위가 재능, 운, 고용주, 경제 흐름 등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상시 불안 상태에 둔다.
2. 해결방안: 어떻게 나만의 질서를 찾을 것인가
철학(Philosophy): 타인의 평가를 ‘이성의 법정’에 세우는 일이다. 세상의 비난이 타당한지 이성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근거 없는 다수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 지적 자존감을 확보한다.
예술(Art): 비극은 실패한 이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게 하고, 희극은 기득권의 허세를 조롱한다. 예술은 세상이 정해놓은 지위의 서열이 얼마나 가변적인지 폭로하며 우리를 해방한다.
정치(Politics): 현재 우리가 추종하는 가치들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시대가 선택한 결과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가치를 지향하거나 나만의 기준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기독교(Religion): 죽음(Memento Mori)의 사유다. 거대한 죽음이라는 상수 앞에 서면 세속적인 지위의 차이는 0에 수렴한다. 광활한 우주적 관점에서 현재의 불안을 축소하는 전략이다.
보헤미아(Bohemia): 물질적 성공이 아닌 영성, 창의성, 우정 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소수의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다른 '나만의 리그'를 만듦으로써 평가의 주체를 바꾼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으로 불렀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단순히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 끝에서 내가 스스로를 밀어낼 수도, 혹은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할 수도 있다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 앞에서 오는 어지러움이다. 즉, 불안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역설적인 증거다.
그러니 불안이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지금 성장의 한계선에 서 있다는 신호다.
익숙하고 안전한 장소에서는 절대 현기증이 일지 않는다. 오직 내 세계를 확장하려 할 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점에 발을 내딛으려 할 때만 겪는 필연적 성장통인 셈이다. 이 현기증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통제력이야말로 인생을 버텨내는 힘이다. 비로소 불안은 나를 무너뜨리는 결함이 아니라 나를 도약하게 만드는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불안하지도 않다. 지금의 삶에 뜨거운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연료가 새어나가면 화재가 되듯, 불안도 방향을 잃으면 우리를 태워버린다. 불안을 나의 힘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통제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RAS(망상활성계, Reticular Activating System)이다.
우리의 뇌간(Brainstem) 깊숙한 곳에는 망상활성계라 불리는 고도의 필터링 시스템이 존재한다.
인간의 뇌는 초당 쏟아지는 수백만 비트의 정보를 모두 처리할 수 없기에, RAS라는 게이트키퍼를 통해 '중요하다'라고 판단되는 정보만을 선별하여 의식의 수면 위로 올린다.
그로스 해킹의 언어를 빌리자면, RAS는 내 삶이라는 서비스의 '선행 지표'와 같다.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어떤 지표를 대시보드에 띄울지 결정하는 운영 로직인 셈이다. 내가 '빨간색 차'를 사기로 마음먹는 순간, 길거리에 그토록 흔하던 빨간색 차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현상은 RAS가 '빨간색 차'를 중요 데이터로 분류하여 필터의 최상단에 배치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다. RAS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편집된, 지극히 주관적인 '데이터의 결과물'이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내 세계의 채도와 명도가 결정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불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근거가 된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의 실체를 '지위(Status)'에서 찾는다.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이유는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구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능력주의(Meritocracy)'가 우리의 RAS를 오염시켰다는 점이다.
능력주의는 "성공은 능력의 증거이며, 실패는 존재의 결함"이라는 잔인한 서사를 우리 뇌의 기본 쿼리로 입력한다. 오염된 알고리즘이 RAS에 장착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온 세상에서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증거'만을 집요하게 수집하기 시작한다.
4:00 페이스로 달려가는 러너의 뒷모습, 동료의 승진 소식, 소셜 미디어를 가득 채운 타인의 소식들. RAS는 이 모든 노이즈를 '생존에 직결된 신호'로 오판하여 의식의 대시보드에 표기한다. 필터가 '타인의 속도'와 '사회적 성취'라는 단일 키워드에 고착되어 버린 결과다.
불안은 여기서 발생한다.
RAS가 끊임없이 가져오는 '비교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자존감은 마모되고, 우리는 스스로를 '실패한 존재'로 프레이밍 하게 된다. 불안이 멈추지 않는 것은 내 시스템의 고장이 아니라, 오히려 RAS가 너무도 성실하게 '타인의 기준'이라는 잘못된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시스템 보고서다.
내 뇌의 검색 엔진이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버린 비극인 셈이다.
불안이라는 유독 물질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맡겨두었던 'RAS의 주도권'을 다시 회수해 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질서를 스스로 확립할 것인가.
첫째, 필터링의 기준을 재정의해야 한다.
세상이 강요하는 외부의 기준 -연봉, 회사, 평판- 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통제 불능의 변수를 RAS의 우선순위에 두면 불안은 영원히 지속된다. 대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수, 즉 '어제의 나보다 나은 감각', '일상에서 실천한 다정함', '러닝의 호흡'을 핵심 지표로 입력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오늘 내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를 중요 데이터로 설정하면, RAS는 남들의 비난 대신 세상과 연결된 다정한 순간들을 먼저 포착해 낼 것이다.
둘째,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수를 내 삶에 도입해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이 해결방안으로 제시한 죽음의 사유는 RAS를 초기화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모든 변수를 무력화하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기준 앞에 서면, 세속적인 지위의 서열은 먼지 같은 미미함으로 축소된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나를 옥죄고 있는 사소한 불안들을 '필터 예외 항목'으로 분류하여 삭제하는 용기를 준다. 죽음의 렌즈로 삶을 조망할 때, 비로소 RAS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만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셋째, 불안을 '부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불안이 밀려올 때 나는 그것을 나를 가라앉히는 파도가 아니라, 내가 지금 깊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조여 오는 그 감각은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몸의 언어다.
"아, 내가 지금 또다시 타인에 매몰되어 내 호흡을 놓치고 있구나"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순간, 날카롭던 불안은 나를 다그치는 채찍이 아니라 내 페이스를 찾아가라는 다정한 신호로 변한다. 불안은 나를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내가 나다운 궤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 주는 가장 예민한 나만의 센서로 작동하기 때문.
삶의 바다로부터 스스로를 수면 위로 떠올리려는 부력으로 존재하게끔 전환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의 속뜻은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듣는 '긍정'이라는 말은 사실 꽤나 오해받기 쉬운 단어다. 대책 없는 낙관이나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가 긍정의 본질은 아닐 테다. 내가 생각하는 긍정은 내 뇌의 검색 엔진인 RAS(망상활성계)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도 다정한 '시선의 조율'에 가깝다.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수많은 엔트로피들이 내 평온을 파괴할 기회만을 항시 엿본다. 그 유독한 소음들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줄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필터를 정밀하게 조정할 수밖에 없다.
RAS가 타인의 빛나는 성취나 나의 초라한 결핍만을 수집하도록 방치하면, 정작 내 삶을 밀고 나갈 작은 기쁨들을 발견할 공간이 사라진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내 뇌의 알고리즘이 나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 필터의 값을 '나의 성장'과 '해석의 여지'로 유연하게 옮겨놓는 일이다.
서른의 문턱에서 이제는 안다. 불안은 결코 기분 좋은 활력이나 든든한 뒷배가 될 수 없음을. 그것은 때로 잠을 앗아가고, 공들여 쌓은 평온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지독한 소음이다. 하지만 그 소음이 이토록 시끄럽게 들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여전히 더 나은 삶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는 정직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에게 불안은 결코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러니 나는 기꺼이 불안하기로 했다.
이 소음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밀한 열망의 반증이다. 내 안에는 오롯이 정립된 나만의 질서가 있고, 지독한 소음 속에서도 내 페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단단한 기록들이 있다. 나는 나를 아니까, 내 시간을 아니까, 나를 믿어줄 사람은 지구상에 나밖에 없다.
역시 불안은 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