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인생] 4: 사랑과 다정함은 한 끗 차이

by 민석
KakaoTalk_20260317_000228704.jpg 260315 - 서울마라톤 10km 피니시 포토 존


마라톤을 뛰는 게 그렇게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교통통제를 뭐 그렇게 많이 하고, 잘난 척 무리 지어서 슈퍼맨 행세를 하는 게 같잖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마라토너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대회를 너무 자주 한다며 무조건적으로 반발하는 그들을 향해 반발심이 먼저 든다. "내가 열심히 살아보겠다는데, 왜 저렇게 불평만 늘어놓는 거야?" 하고 말이다.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 "그거 참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면 안 되나?"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 내지는 몇 년을 준비한 결실을 빚으러 오는 사람들인데,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러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대회날 하루만이라도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면 안 되나?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물론 당연하다. 어제 서울마라톤을 뛰고 온 사람으로서 나도 내 입장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뿐.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께 끼치는 민폐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다. 얼마나 불편하실지 너무나 깊게 이해한다.


다만 서로의 이해가 너무도 강력하게 상충되는 부분이라, 현재로서는 돈 되는 것, 표 되는 것이 득세할 뿐이다. 전형적인 돈과 힘의 논리랄까.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표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느 쪽도 신뢰하지 않고 어떠한 정치성향도 없다)


"왜 이렇게 주변 사람과 환경을 욕하기 바쁜가?"

최근 내가 느끼는 사회에 대한 결핍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참으로 집단을 배척하기 좋은 세상이다.


세상에 연대가 사라졌고, 타인의 비극을 조롱하는 수준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NPC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단 0.1g도 나누고 싶지 않아 하는 양상이 여느 때보다 심각해진 것 같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방하고, 헐뜯고, 내 입장을 왜 안 봐주냐고 툴툴대기 십상이다. 문득 요즘 들어 '세상에 큰일이 닥치겠다, 자연재해 혹은 3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겠다' 같은 우스갯소리의 망상을 뇌 내에 지껄여대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허울 좋은 명분들로 들어찬 '집단적 가스라이팅'이라는 구름으로 두둥실 떠오른다. 떠오른 구름들은 스레드, 인스타, 유튜브라는 초거대 공장들의 원재료가 되어 수십억 명의 '맹인'을 만드는 유독 물질로 가공된다. 1급 유독 물질, 연대와 사랑과 따뜻함을 헤치는 발암 물질. 그것의 이름은 바로 '불안'이다.


불안한 것이다.


[집단에 도태되진 않을까,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남들은 잘되는데 왜 나는 그대로인가, 집은 언제 사고 주식은 언제 오르는가, 승진은 언제쯤 하는가, 이대로 사는 게 맞나] 하며 말이다.


그렇다면 요즘의 인간 군상들은 왜 이렇게 스스로 파편화되기만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떤 속성이 인간들에게서 사라져 가는가, 무엇을 채워야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다시 내 곁의 사람을 NPC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요 며칠간 고민하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


그것은 바로 다정함이다. 다정함이 없기 때문이다.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첫 번째 형용사이자 동사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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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어야 된다는 말이 있다. 돈, 권력, 명예, 서울 자가와 같이 신분이나 상태를 수식하는 것들은 나의 행복이 되어줄 수 없으며,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다정하게 살기'라거나 '사랑을 전하기' 등과 같이 동사형을 본인의 행복으로 가지라는 것이다. 삶의 목적 대신 삶의 태도를 지향점으로 두라는 의미다.


삶의 태도는 곧 인생의 본질이다.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에는 틀린 것 하나 없다.


우리네 인생에서 다정함은 아마 삶을 조망하는 최하단의 부품이자, 동시에 인생이라는 조감도를 밝혀주는 등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소한 것에서 다정함을 나누는 태도로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다정함을 전달받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테고, 그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게 될 테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연과 인생이 펼쳐질 테니 말이다.


다정함의 조도가 어두우면 그만큼의 세상만을 비출 수 있는 것이고, 다정함이라는 등대의 밝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내가 못 보던 세상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전한 빛의 크기만큼 내 세상은 넓어지는 것이고, 세상은 나로 말미암아 따뜻함을 0.1g이라도 더 가져가겠구나, 어서 가져가시오 하고 힘주어 외쳐볼 수 있는 선순환의 매개체다.



KakaoTalk_20260317_002005139_01 (1).jpg 한로로 - 0+0 (자몽살구클럽)


그렇다면 '다정함'이란 무엇인가.


나는 관념을 추상적인 것에서 실천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즐겨하고, 줄글로 옮기는 것을 선호한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타인의 언어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것이 FT 논쟁의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변환 과정 없이 나만의 언어로 가지고 있는 F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움받는 F들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정리해 본 내가 생각하는 다정함은,


1) 나의 관점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는 것

2)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우선시하는 것

3) 크기 혹은 정도를 함부로 예측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것


세 가지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기다려야 하고,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유연하게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의 마음을 알기 위해 섬세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 아마 이것이 다정함의 전제이자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본질을 실천할 수 있다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따뜻한 말과 행동이 뒤따라올 테니 구태여 다정함의 실천에 대한 영역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이전 글인 '무지개의 이름은 다정함'에서도 날씨와 다정함에 대한 서사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우리의 삶이 고난하더라도 평범한 마음 이야기를 하며 곁을 지키는 것이 다정함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예측이 아니라, 어떤 날씨든 받아들이는 자세다. 맑은 날, 흐린 날, 구름 낀 날, 그리고 이따금씩 여우비도 좋고, 싸락눈도 좋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거나 재단하기보다, 어떤 마음이든 다정함이라는 무지개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안의 햇살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 무지개의 이름은 다정함 中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다정해지지 않는 순간은 대체 언제인가.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왜 그리도 날카로워지는가(=다정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일주일 가까이 고민을 했다.


내가 생각한 이유로는


1)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고 생각될 때

2)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3) 탓할 수 있는 대상이 나 밖에 없을 때


정도가 있는 듯하다.


쉽게 말해서, 당연히 나를 알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를 감정적으로 이해해 주지 못할 때, 그리고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을 때 다정함을 잃는 것 같다.


결국 옆에 있는 사람을 타인이 아니라 내 사람이라고 일원화해 버리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재단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상충되는 행위였던 것이다. 예측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관찰은 사라지고 판단만 남는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 '나쁜 남자' 혹은 '나쁜 여자'가 무게추를 가져가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들은 다정함을 빨아먹도록 설계되었다. 예측이 불가능하니 수시로 타자화가 되는 것이다. 타자화가 되니 무게추가 쏠리는 쪽으로 다정함이 스르륵 흘러내려가는 것이다. 타자일수록 다정해지는 인간 본성의 심오하고도 신비로운 구조적 미스터리다.


그래.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재단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다정함에서부터 유배시킨다.


결국 다정함은 타인에게 건네는 무차별적 예의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평생 타자로 존중하는 용기에서 완성된다.


본능의 영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돌봄의 역량이다.


KakaoTalk_20260317_002005139_02.jpg 한로로 - 사랑하게 될 거야 (이상비행)

다정함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나에 대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내가 가장 무기력해지는 순간은 '소중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이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더니, 나는 내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것들에 나를 대입하는 순간에서 꽤 큰 희열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내가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깨달은 순간 나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바뀔 미래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며 현실의 나를 안정시켜 주는 그런 메커니즘이랄까.


패션 고시생, 패션 취준생들과 같은 결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메타인지 관점에서 분명 다르다. 가장 큰 차별점은 '관점의 주체'이다. 관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향해 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이뤄내겠다고 다짐하면 이뤄내기 위해서 촘촘하고 큰 그물을 여러 겹으로 쌓아두고, 그것을 결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주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일까? 아니면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나는 정말 남에게 마음을 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러니 아마 소중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그리도 무력해지는 것이겠지.



다른 글에서 길게 다루겠지만,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 하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알랭 드 보통 - 불안'을 추천하고 싶다.


불안의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해서 나름대로 MECE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기독교' 챕터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다. 큰 것 위에 더 큰 것-죽음-이 있음을 간직하는 순간 모든 것에 초연해진다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칼 세이건의 'pale blue dot'과도 궤를 같이 한다.


불안이 들이닥칠 때에는 죽음을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내 삶은 변하지 않을 거야' 하며 체념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KakaoTalk_20260317_002005139_03.jpg 백예린 - Rest (Every Letter I sent you.)


결국 지금 내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돈, 권력, 출세 등과 같이 길고도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것, '상태'에 해당하는 것, 사라지면 그뿐인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소소한 순간들에서 감사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인 셈이다.


남들에게 동요될 필요도, 구태여 그들에게 나의 안목을 빼앗길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나의 호흡대로 삶을 바라보는 렌즈를 장착한 채로 사물과 사람, 그리고 내 주변을 대하면 되는 것이다.


내 삶의 행복과 현재의 나를 가장 단단히 결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다정함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니, 다정함은 사랑과 가장 가까운 형용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우리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 상대를 놓치지 않으려 자신의 마음보다도 더 크게 내어놓는 연인들. 그야말로 다정함과 사랑은 한 끗 차이다.


아마 다정함은 사랑의 형용사 버전 중 하나라서 그런가 보다. 사랑이라는 명사가 상대의 삶에 스며들어 실재하는 따뜻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정함이라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사랑이 상태로만 머물지 않고 소중한 사람의 인생에 스미는 순간, 우리는 그 순간을 다정함이라 부른다.


KakaoTalk_20260317_000418308.jpg 다정하지 않은 이들을 받아내려 하지 말 것.


앞으로 사람에게 상냥함을 베푸는 일이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상냥함과 다정함을 전한다는 것은 '기꺼이 상대에게 비웃음을 당할 용기'와 '주는 마음의 행복'을 항시 지니고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모순적이게도, 다정함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인간의 가장 큰 원동력이자, 인간이라는 유약한 존재가 타인으로부터 대우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발현된 '양면적 존재의 사유'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자의든 타의든, 나는 다정함으로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따뜻한 말을 전하고, 내 일상 속에서 그들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세상이 따뜻해졌으면 한다. 나는 나대로 내 세상을 아낌없이 다정함으로 비춰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