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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ama Oct 02. 2018

#70. 운동이 하기 싫은 진짜 이유

[극사실 실천법] 운동을 거부하는 심리를 알아보자!


    누군가에게 '권태롭다'는 얘기를 들었다 치자. 어떤 기분이 드는가? 뭔가 내가 막 '잘못'을 했고, 뭔가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드는가?


    하지만 '권태'는 몹시도 '이기적'인 단어다. 권태는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롯이 '일방'이 느끼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권태는 명확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냥 일방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권태로움은 느낄 수 있다.






    권태의 사전적 정의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다. 권태를 느끼는 스스로가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누구도 그 감정에 기여하지 않았다.


    '권태로움'을 이유로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신의 '게으름'이나 '싫증'의 원인을 '관계'로 돌리려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권태는 혼자 느끼고, 핑계는 엄한 관계에 대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그냥 '휴식'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상황을 '관계의 권태'로 '위장'한다. 그래서 관계를 작살낸다. 하지만 관계는 그냥 놔두고 본인에게 집중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다.


    권태를 '본인 스스로의 문제'라고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관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인간은 참 본인에게 한없이 너그럽다. 그 너그러움으로 인간은 진화와 생존에 성공을 했는지도 모른다.


    권태로운 것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다. 해결 방법은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고 변화를 주면 된다. 그런데 굳이 핑계로 관계를 망가뜨리면 새롭게 '불확실한 관계의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


    '이전 관계'를 희생양 삼은 '새로운 관계'는 보너그럽고 쉽게 다시 시작된다. 쉽고 간단하게 해결 가능한 '스스로의 권태 문제'가 어렵고 복잡하고 진중해야 하는 '관계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까다로워야 할 것에 너그럽게 된다. 이게 '고통의 시작'이 된다.






    어떤 사람은 권태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의 총량'을 따진다. 그래서 참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총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눈 앞의 고통만 '회피'한다. 코 앞의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도망친다. 결국 더 큰 고통을 만난다. 그럼 또 도망친다. 또 고통을 만난다. 또 도망친다. 이런 식으로 '고통의 총량'은 커진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다. 우리 '인생의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시로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문제'라고 인식한다. 왜냐하면 인간 DNA에는 '끊임없는 위기와 변화의 상태'가 '정상 상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불안'해 진다. 이것은 '관계'에서도 적용이 된다.


    관계에서 '위기와 변화가 없는 상태'는 '내가 손해 보는 상황'으로 인식된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관계는 다른 말로 '내가 손해 보는 관계'라는 의미다. 노력을 조금 게 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즉,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이 되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이 상대에게 '헌신적인 사람'의 말로가 비참한 이유다. 일방적인 헌신은 상대로 하여금 '노력 없이 유지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게 만든다. 따라서 상대는 '더 많이 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위기와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해 보는 상황'을 '이익 보는 상황'으로 만들고자 한다.


    나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상대를 곁에 두려는 시도는 '진화의 결과'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상대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개체만이 DNA를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헌신적인 성향의 사람에게 권태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너무 헌신적'이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권태를 느끼게 한다. 평탄하지 않아도 좋고, 더 많이 얻을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보다 '손해 보는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이기심'은 진화의 동력이다.


    예를 들어보면 나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치자. 이것이 지속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난 저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 잘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아! 가만히 있으면 손해네!'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선택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진행된다.






    웬 잡설인가 싶겠지만 진화심리학적인 해석이다. 진화심리학은 심리학과 생물학의 연구가 결합된 학문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문제에 직면할 때 타고난 본능과 정보로 가장 성공적인 해결책을 찾고 적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건강과 수명과 이점을 얻었고, 더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여긴다.


    진화심리학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두뇌는 정보 처리 장치이며 외부 및 내부 입력에 대한 '응답'으로 '행동'을 생성한다.

두뇌의 적응 메커니즘은 '자연선택'과 '성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

다른 신경 메커니즘은 인류의 진화론적 시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현대 인류는 문제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진화 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석기시대에 시작된 적응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대부분의 인간의 두뇌 기능은 내용과 과정에 대한 의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해결하기 쉬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도 무의식 상태에서 매우 복잡한 신경 메커니즘에 의해 해결된다.


    지각, 감각, 의식, 학습, 선택적 적응, 감정, 동기, 인식, 개성, 언어, 연애, 양육, 가족, 친척 등과 같은 분야에서의 인간의 본성과 행태를 연구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






    보통 우리는 운동을 '지겹다'라고 표현한다. '귀찮다'라고도 한다. 운동에 대해 권태롭게 느끼는 것이다. 운동이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내 몸이 건강해진다.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생긴다. 운동 기구가 이익인가? 내가 이익인가?


    지겹다, 힘들다, 하기 싫다고 느끼는 것은 나다. 그래서 하지 않았을 때 - 운동과의 관계를 끊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오롯이 내가 받게 된다.


    운동이 권태롭게 생각되는 이유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게으른 내가 문제인 것이.






    왜 운동에 대해서 게을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가 명확한데도 운동을 지겹게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득'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운동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고통을 '상쇄''이득'이 필요하다. 그 이득을 바로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이 지겹고, 귀찮고, 권태로운 것이다. 오히려 즉각적인 체감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한다.


    검게 탄 피부에 복근 있는 여성과 여리여리하고 아파 보이는 여성이 있을 때 어느 여성이 이성으로부터 더 많은 '호감과 헌신'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화심리학에서는 여리여리하고 약해 보이는 여성이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고 본다.


    건강하고 근육이 있는 사람은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지금이야 '몸짱'이라고 칭송받지만 예전에 밥값을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을 뿐이다. 당연히 죽지 않을 정도로 아파 보이는 게 더 사는데 유리했다.


    아들러도 말을 했지만 '약한 것은 권력'이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상대로 흔히 쓰는 수법이다. 아이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쓰는 수법이다. 자신의 약한 면을 '권력화' 하는 것은 진화심리학적인 인간의 행태이다.






    운동은 힘든 일이다. 구석기시대로 치면 '생존'과 연관된 활동이다. 먹이를 찾고, 도망치는 일이 오늘날의 운동이다. 구석기에는 매일, 매번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 오늘날에는 왜 부자연스러운 일이 됐을까?


    매일, 매번 있던 일은 맞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존을 위해 생명을 걸고 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매일, 매번 이 포인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해야 했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니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하지 않는 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에너지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낀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망치고 잡아야 하는 상황은 언제든 올 수 있으니 에너지를 충분히 '비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오히려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운동을 하기 싫어하는 것도 '본능'인지 모른다. 여유롭게 에너지를 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뇌도 최대한 안 쓰는 쪽으로 진화를 했다고 하니 일리가 있다.


    그래서 충전이 잘된 과체중의 몸이 진화적으로는 '우성'에 해당한다. 효율이 좋은 몸인 셈이다.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은 구석기에는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운동을 안 하고도 건강할 수 있으면 좋다. 큰 복이다.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인내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운동을 안 한다고, 체력이 약하다고 생존을 위협을 받는 시절은 아니다. 그래서 운동이 필요 없으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다. 몇십만 년 후의 인류는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DNA에는 '과거 방식의 생존 룰'이 적용되고 있다.


    DNA 속의 '위험'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몸을 움직이면 됐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눈으로 확인하면 이미 늦는다. 선제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게 '운동'이다.


    그 위험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생존 이상으로 추구하는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본능'처럼 하기 싫은 운동을 해낼 수 있다.


    권태로운 건 운동 그 자체가 아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안이함'이 권태로움을, 게으름을, 그냥 싫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음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질 높은 생존'을 추구할 수 있다. 그래야 '바르고 현명한 판단'을 지속할 수 있다.


    이제 진화의 압력에 굴하지 말고, 잉여 에너지를 근육으로 전환시키며 살아보자. 굿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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