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뻐꾸기가 둥지에 없던 밤과 123 내란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그날은 사건만 남았고, 구체적으로 그날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계절조차 모르겠다. 그저 막연히 87년~90년 사이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당시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조금의 여윳돈을 보태고자 잠만 자는 하숙을 낸 적이 있었다. 방이 남아돌아서가 아니었다. 난 방을 빼고 거실에서 자야 했다. 집 가까웠던 서울대 공대 형이 하숙을 들어왔다. 나는 일찍 학교에 가고, 그 형은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 형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짝 열어본 방 안엔 짐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그 당시에 귀했던 더블테크 콤팩트 오디오와 당시의 히트곡인 '개똥벌레' 테이프가 있었다는 것이다. 형이 없는 낮 시간에 '개똥벌레' 노래를 몰래 틀어 봤던 기억이 있다.
일이 벌어진 것은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밖이 어두웠던 것 같기도 하니 어쩌면 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건장한 성인 두세 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다지 크지도 않았던 집의 거실은 순식간에 가득 찼다.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들은 순식간에 우리 집을 점령해 버렸다. 그때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신발이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던 거실에 신을 신고 들어 왔다. 거실 장판에 신발자국이 선명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구두를 신고, 나의 침실을 유린하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그 사람들의 '힘'을 느꼈다. 아무런 내막도 모르는 어린 나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해선 안 될 것 같은 어둠의 힘을 느꼈다. 그래서 누구도 '신을 벗으라!'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되는 사람들 마냥 집 안에서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기력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상황 자체는 큰 공포였다. 커다랗고 검은 사람들이 구둣발 채로 우리 거실과 주방과 방을 돌아다녔다. 공포에 점령을 당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공포를 극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쾌했지만 무기력했다. 우리의 공간이 유린당하는 것이 분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아이가 어른 등에 타고 바둥거려 보는 것은 발칙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 사람들은 갑자기 후다닥 들어와선 그 형의 방을 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함부로 보여주냐'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그 형 방에 들어가서 방을 샅샅이 뒤졌다. 물론 구두를 계속 신은 상태였다. 한참 방을 뒤지더니 허락도 없이 거실에 있는 우리 집 자주색 버튼식 전화기를 집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전화 내용을 옆에서 들었는데 무슨 암호 같은 말이었다. '뻐꾸기가 둥지에 없다'와 같은 식의 통화를 하더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르르 나가 버렸다. 어머니와 나는 더러워진 거실과 방을 걸레로 닦았다.
그날의 일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텔레비전 안에서만 보던 공권력의 실체는 상당히 공포스러웠다.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으니 그 공포는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했던 것이었다. 다만 내가 어려서 몰랐을 뿐이었다. 그날 나는 가상의 것인 줄 알았던 것을 대면했다.
시간이 지나서 들은 그날의 내막은 이랬다. 그 형의 친구가 서울대 학보사에 있었는데, 데모와 관련된 기사의 동판을 그 형이 갖고 있게 되어 지명수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사들이 그 형을 체포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쳐들어온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는 노태우(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혐의, 그리고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고 데모, 전경, 최루탄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숨은 이야기가 더 있었다. 그 형이 수배를 당하고 나서 우리 부모님께 긴히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본인의 방에 있던 책 몇 권을 숨겨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로는 가지고만 있어도 체포, 구속될 수 있는 책이었다. 나중에 아버지께 들은 얘기로는 그 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적은 책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책을 연탄보일러 옆 연탄광에 숨겨 놓았었다고 하셨다.
그 형의 수배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풀렸고, 어느 날 형의 짐은 조용히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방을 되찾았다. 그해 명절에 그 형이 참치 선물 세트인지 햄 선물 세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선물을 보내왔다. 5.18 관련 책들을 숨겨주어서 큰 화를 피했다고 말이다.
지난 12월 3일. 내 첫 일성은 "이 새끼 미쳤나 봐!"였다. 그리고 나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어린 시절 그날의 느낌들이 되살아 났다. 강하고 더러운 힘에 짓눌리는 그 불쾌하고 무기력하고 분한 느낌들이 다시 느껴졌다. 아직도 12월 3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6.25 한국 전쟁이 70대 이상의 국민들에게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주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우리의 역사, 정치사에 이 집단 PTSD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전후 세대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이상한 논리와 결정들이 이 집단 PTSD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면 그 어마어마한 전쟁 이후에 그 어떤 위정자들도 전 국민이 모두 겪은 PTSD를 관리해 준 적이 없다.
지난 12월 3일. 한국 전쟁 이후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집단 PTSD를 온 국민이 겪게 되었다. 법의 허울을 쓴 내란 세력들은 자신들이 신인 양, 왕인 양, 주인인 양 굴었다. 곧장 끝날 줄 알았던 내란은 2차, 3차 집단 PTSD를 국민들에게 누적시켰다. 12월 3일 이후의 집단 PTSD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까.
이 집단 PTSD에 대한 가장 확실한 치료는 가해 세력에 대한 단죄라고 믿는다. 내란으로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수많은 국민의 일상을 파괴한 세력들을 발본색원하여 국민의 기대치에 준하는 벌을 가하는 것이야 말로 전 국민이 겪는 집단 PTSD에 대한 가장 적확한 치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구둣발의 검은 형사들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그 사건은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을 했을까? 어떤 아비투스(habitus)가 나에게 내재되게 되었을까? 그 아비투스는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꿨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여전히 불쾌하고, 무기력하고, 분한 느낌이 든다.
내 삶의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대중 속에 숨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적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배후의 적들은 무례하고 무식할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고 뻔뻔하다. 배후의 적들을 볼 때마다 불쾌하고, 무기력하고, 분하다. 공동체의 편익을 제일 많이 취하는 자들이면서, 공동체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따른 피해를 스스로 가장 많이 본다. 공동체에 도움은 안되는데 손은 제일 많이 가며, 자신의 삶을 최악으로 만듦으로써 공동체에 폐를 끼치는 헛똑똑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후의 적들과의 동거는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공동체는 다양성과 상대성의 이름으로 배후의 적들과 공존하면서 사회적 면역을 높여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집단 PTSD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온갖 피해는 다 봤으면서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헛똑똑이지만 피해자는 피해자다.
물론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바른 선택으로 집단 PTSD에 대한 정당한 관리와 치료를 요구할 수 있다. 사후약방문 일지언정 안 하는 것보다 낫다. 그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
사전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내란 종식으로 가는 첫 번째 출입문이 열린 셈이다. 남은 문이 모두 활짝 열릴지, 지난번처럼 배후의 적들이 문고리를 잡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대놓고 문고리를 잡는 일이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 보니 무섭게도 무감각해지고 있지만 그 문고리를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있다.
내란 종식의 문을 열어 그 어둡고 불쾌하고 무기력하고 분한 마음의 PTSD를 떨쳐 낼 것인가? 아니면 한국 전쟁의 그들처럼 향후 70년의 세월을 음모와 거짓 속에 파묻혀 살 것인가는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
* 투표 잘하자는 얘기를 길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