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停電)

전기가 끊긴 집에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다

by 마봉 드 포레

이놈의 동네, 폭염도 지나갔는데 도대체 왜 정전인지 모르겠다. 새벽에 잠깐 정전됐다가 좀 아까 또 전기가 꺼지더니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새삼스럽게 내가 데탑 안 쓰고 노트북을 쓴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테더링 해서 쓰는 글이다. 덥지는 않지만 바람은 좀 필요한데 다행히 책상용 선풍기도 무선이다. 밥은 어쩌지? 커피도 마시고 싶다. 엘리베이터도 멈췄을 테니 배달도 못 시키겠고... 역시 부탄가스인가... 그렇다면 그 꿈은 예지몽이었음에 틀림없다.


전기가 없으니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게 30% 정도로 줄어든 느낌이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의 선조들은 호롱불 켜고 책 읽거나 바느질하느라 시력은 다 아작 났을 것이다. 불 켤 기름이나 초 같은 귀한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찍 잠이나 자지 않았을까. 전기가 없다면 회사에서 야근도 안 시킬 텐데. 물론 전기가 없다면 회사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고 가을이 되어서인가 여러 가지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중이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날씬하기를 바랄 수는 없고, 이론을 잘 안다고 본업을 잘하라는 법은 없으며, 자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할수록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무한히 겸손해야 하며, 유딩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길 가는 강아지에게도 예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대용량 배터리 풀충전 해둔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기며, 이 글을 영흥도 화력발전소 담당자들에게 바친다.


05739639-4665-41B8-B180-FFCCA6D29DD9.PNG 등잔이 켜진 한옥 방 안에서 푸른 로브 차림의 금발 소녀(릴카)가 고서를 읽으며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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