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성단의 중심에서 BL 치정물을 쓰다
몸이 나른하고 꺼질 것 같다.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주 1회짜리 연재도 펑크를 내고 말았다. 낮에 자고 저녁에 자고 또 졸려서 밤에도 잤는데도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지도 못했다.
두려워하던 월요일이 다시 왔다. 온몸이 통신사 앞 풍선인형보다 더 힘이 없어 약 이름을 챗순이한테 주고 효과와 부작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 타이핑할 힘도 없어서 음성으로 불러줬다. 음성으로 받아쓰기 기능은 있는 줄은 알았어도 써본 적은 없었다. 가끔가다 잘못 눌러서 디게 성가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편리한 기능인지 몰랐다. 딕션을 정확하게 하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99%의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 라든가 '그....' 같은 쓸데없는 말은 알아서 빼 주었다.
아무튼 약의 효과와 부작용 by 챗순.
● 약 1 (항우울제. 세로토닌 조절)
효과: 우울감 감소, 의욕 개선, 집중력 회복, 사고 흐름 정리, 불안 감소, 감정 기복 안정
초기 흔한 부작용: 메스꺼움, 속 메슥거림, 구역질, 식욕 저하(오! 이건 기대되는데?), 어지러움, 멍한 느낌, 두통, 몸 피곤함
● 약 2 (항불안제. 긴장, 불안, 초조, 공황을 빠르게 누그러뜨림)
효과: 긴장 완화, 근육 이완, 불안 감소, 초조/흥분 진정, 잠 잘 오게 도움
초기 흔한 부작용: 몸에 힘 풀림, 기운 빠짐, 졸림, 멍함, 집중력 저하, 어지로움, 전신 무기력
● 약 3 (기분 안정제, 충동조절, 두통 예방)
효과: 공격성/충동성 완화, 불안 완화, 과도한 감정 반응 줄임, 두통/편두통 예방
흔한 부작용: 인지 둔화, 집중력 저하, 말이 잘 안 나오는 느낌, 생각 흐름 끊김. 손발 저림, 몸 피곤함, 탈수감, 속 불편함
● 3개를 같이 먹었을 때 합쳐져서 생기는 증상들
전신 무력감 폭발
멍한 느낌 + 집중력 0
메스꺼움, 속 뒤집어짐
몸살 같은 통증
머리 회전 안됨
눕지 않으면 못 버팀
뭔가 하고 싶은데 몸이 안 움직임
기력이 바닥처럼 느껴짐
삶이 전체적으로 슬로모션처럼 느껴짐
처음 1-3일이 가장 힘들다고 하니 오늘(월요일) 내지는 내일까지도 그럴 텐데 회사에서 누워있을 수도 없고 큰일이다.
나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의욕저하라서 병원에 간 건데 저 약을 처방받는 게 맞나? 챗순이는 그렇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내가 뒷사람 기다릴까 봐 너무 랩처럼 말해서 의사가 보기에 불안해 보였나? 이제부터는 하던 대로 해야겠다. 의사는 차분하던데 왜 내가 속사포처럼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뒷사람 좀 기다리는 게 뭐 대수라고.
이게 한국사람이 그렇다니까. 마트에서도 뒷사람 기다릴까 봐 왠지 미안해서 아직 자기 물건 다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대충 장바구니에 빨리 쑤셔 넣고 다른 데로 옮겨가서 거기서 짐 다시 정리하잖아. 하지만 다음 사람이 이미 내 옆에 와서 카드 꽂을 준비 하고 서있는데 어떻게 안 비켜주냐. 이놈의 빨리빨리 문화 같으니라고. 손 느린 노인네들은 짐 좀 천천히 챙길 수도 있는데 이노무 젊은 놈들은 당장 계산대에서 비키지 않으면 치고 나갈 것처럼 눈치 주고 있고.
약 먹으면 바로 메스꺼움 시작이라 아침 약 먹기 싫어서 괜히 챗순이한테 말 시키면서 귀중한 월요일 오전 시간을 날려먹고 있다. 월요일 오전은 일주일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주말 동안 들어온 이메일 정리하고 이번 주에 할 일, 이번 주에 잡힌 회의, 이런 것들 정리해야 하는데, 집중력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기 싫다는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쌓여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싫다는 것.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고 뭘 어떻게 하면 될지 대강 아는데, 하기 싫다. 이제 회사에서 쓸 수 있는 배터리 용량은 다 닳은 모양이다. 평생 분량의 배터리가.
그러고 보니 소설 안 쓴 지 거의 한 달 돼 간다. 틈틈이 쓰던 티르윈 전원일기 - 내가 꼭 쓰고 싶었던 - 은 배경은 다 떠올랐고 주인공들도 다 눈을 떴는데 이제는 워드 펴 놔도 아무것도 안 써진다. 애들이 안 움직인다. 피온과 아녜슈카와 카페 사장님 부부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애들 다섯 명이 눈 다시 뜨기까지 25년이 걸렸는데 캐릭터가 다시 안 움직이게 놔둘 수는 없다. 어떡하지? 망집왕비가 내 평생 마지막 소설만은 아니길.
망집왕비는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 시장성을 생각해서 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무겁다. 이건 절대 웹소설 플랫폼이나 단행본 시장에서 받아줄 글은 아닌 것 같다. 왜 난 이런 글만 쓰지? 좀 잘 팔릴만한 글을 써도 되지 않나? 아주 그냥 체액이 튀는 더럽고 끈적끈적한 BL 치정물 같은 거 쓰면 바로 OK 일 텐데. 아 내가 그럴 줄 알고 참고할 만한 책을 몇 권 샀지. 후후. 근데 BL 이 아니라 남남 주인공인 문학을 샀네그려. 그리고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책은 100% 내용이 슬프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슬픈 소설을 지금 같은 정신상태로는 읽으면 매우 크리티컬 한 영향을 줄 것 같아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열어봤다.
웹소 플랫폼에서 원하는 건 사회적인 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소수자의 사랑이 아니다. 그냥 주인공만 남남인 야한 소설이지. 그러니 나는 참고서적(?)도 잘못 샀다. 내가 산 건 그냥 문학이다. 예를 들면 이미 집에 있는 책이지만 E.M. 포스터의 모리스(읽고 나서 울었다. 영화도 보고 울었다)는 문학이지 BL이 아니잖아. 워 굳이 따지자면 BL의 귀족계급 정도 되시겠다.
내가 BL을 쓴다면 아마 처음에는 신나게 '더러운 치정물 쓰겠어!' 하고 시작했다가 결국은 무겁게 가겠지 싶다. 그렇다고 내가 '조반니의 방'이나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같은 문학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 리도 없잖아(일단 그쪽은 작가들 본인의 체험이 들어갔으니 고뇌의 묘사가 넘사벽이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폴란드 사회주의 격변의 시기 얘기까지 들어간 수작임). 결국 이도저도 아닌 글을 또 공들여 쓴 다음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줘서 약이나 또 먹고 누워 있겠지. 세라비처럼 이도저도 아닌 장르. 망집왕비도 마찬가지로 이도저도 아닌 장르. 세상에 이도저도 아닌 장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내가 만들지 않는 이상 나는 영원히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너무 많이 자고 맨날 졸려서 문제지만 6년 전쯤에는 수면장애가 있어서 수면보조제를 처방받아 먹었다. 근데 그 약이 처음 며칠간은 일시적으로 괴이한 꿈을 꾸게 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때 정말 와아아... 시야각 끝에서 끝까지 꽉 찬 별들을 봤다. 다시 깨기 싫을 정도로 굉장하고 장엄하고 멋있었다. 챗순이가 그러는데 그건 내가 눈으로 본 게 아니라 뇌로 본 것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표현이 어려울 거라고 했다. 하지만 굳이 우주에서 비슷한 곳을 찾자면 구상성단(Globular Cluster, 헤라클레스 성단이나 오메가 센타우리 등) 일 거라고 했다. 만약 내가 구상성단 안의 우주 공간에 간다면 거기서 보이는 장면이 그것에 가까울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봤던 이상한 생명체에 대한 분석도 해주었다. 나는 어제 챗지피티 음성 받아쓰기 기능으로 내가 구상성단(?) 내의 한 행성에서 봤던 눈이 크고 껑충껑충 뛰는 생물체와 바닥이 평평한 바위로 되어 있는 행성에 대해서 챗순이와 얘기하다가 잠들었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멍해진다. 눕고 싶다. 오늘은 날씨도 춥다. 차에 가서 누우면 안 될까? 나는 너무 피곤해서 차에 가서 자다가 온 적이 몇 번 있긴 하다. 멍한 눈으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 후에 잠시 잠적했다가 잠 덜 깨 갖고 온 듯한 멍한 눈빛으로 뽕머리만은 제대로 하고 나타났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다들 일하고 있는데 나만 어디 가서 처 자고 온 게 너무 미안해서 그 장면이 생각나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오늘은 그 짓을 한번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몸이 내려앉는다. 3일쯤 지나면 익숙해진다고 하니 제발 좀 약이 제기능을 발휘하길. 당분간 소설을 쓸 힘은 없지만, 이런 글이라도 쓰면서 버텨야겠다. 적어도 아예 글쓰기를 손에서 놓는 것보다야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