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임무는...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곧이어 레이까지 구조한 마을 사람들은 세라비는 업고, 레이는 부축해서 근처에 있는 낚시꾼들의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불을 피워 두 사람이 몸을 말리게 한 다음 생선살과 감자가 든 수프를 끓여주었다.
비바람은 아침이 되어도 잠잠해지지 않고 거세게 퍼붓다가, 점심때가 지나자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고 해가 빛나며 진창이 된 땅과 이젠 거대한 흙탕물의 흐름이 되어버린 강을 비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레이와 세라비를 낚시꾼의 오두막에서 데리고 나와 마을로 데리고 갔다. 마을의 이름은 라피드 쉬르쿠젤이라고 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마을의 유지이자 예술적인 장의사인 아델린 드몽의 집에 묵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낚시꾼들은 오두막 근처에 쳐 둔 갈기갈기 찢긴 그물을 수거하러 물가로 나갔다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다행히 떠내려가지 않은 짐보따리 하나를 들고 와 레이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파렌베르크에 가서 이카리아의 사신으로써 입어야 하는 사신 예복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뤼넬이 들어 있는 세라비들의 짐가방이었다. 떠내려가는 사람이나 배도 구하지 못하는 급류에서 이 짐가방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레이는 아마도 안에 들어있는 뤼넬의 힘 덕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레이첵이 플로르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뤼넬을 품 속에 보관하고 있었더라면 레이첵도 살았을 지 모른다고 레이는 생각했다. 적어도 배가 제어 불가능해지기 시작했을 때 뤼넬부터 챙길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세라비는 라피드 쉬르쿠젤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첵도 어디선가 구조되었을까 알아보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쿠젤 강 상류에 있는 이 마을 근처에는 ‘물귀신 여울’ 이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귀신 여울’은 보통 때에는 평범한 쿠젤 강의 한 지류일 뿐이었지만, 이번처럼 폭우로 급류가 생기면 무서운 소용돌이로 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강과 물의 여신 플레베르보다 물귀신 여울에 산다는 ‘여울 수호령’에 대한 신앙이 더 강했다.
“이번 같은 폭우에서는 소용돌이를 피해 가진 못했을 텐데.” 예술적인 장의사 아델린 드몽이 말했다. “운이 좋아 여울을 피해 쿠젤 강 본류를 타고 가서 어딘가에서 구조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댁들이 여울 쪽으로 흘러온 것을 보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여.”
“그나마 헤엄이라도 좀 치면…”하고 아델린은 말끝을 흐렸다. 세라비는 “헤엄요? 걔는 누가 도와줘도 헤엄 못 쳐요!”하며 웃었다.
레이는 불안한 눈으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사촌의 생사를 얘기하면서 웃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세라비는 이윽고 아델린이 얼마든지 묵다 가라고 내어준 별채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라비는 사신단을 이끄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무리한 판단으로 배를 빌려 급류를 타게 한 자신의 경솔한 판단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배를 잘 다룬다고 자만해서, 이틀이면 파렌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오판해서, 헤엄도 못 치는 레이첵이 배에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를 타기로 결정한 것은 모두 자신이었다.
레이를 부르면 둘이 같이 대답해야 하는데 한 놈만 대답한다는 사실이 괴로워 세라비는 레이를 부르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나 레이마저 없으면 완전히 혼자 남는 것 같아서 세라비는 또한 레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라피드 쉬르쿠젤에서 지내는 동안 세라비는 하룻밤도 안 빼고 사촌이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꾸었고, 레이첵이 세라비의 호통을 듣고 배 뒷전에 쭈그리고 있는 모습을 꿈에서 천 번도 더 보았다. 레이는 물귀신 여울에 가서 레이첵의 시체만이라도 발견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세라비가 자기가 없는 동안 어떻게 될지 몰라 떠나지를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예술적인 장의사 아델린 드몽이 세라비와 레이를 돕기 위해 나섰다. 물귀신 여울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매년 희생자가 발생하는 라피드 쉬르쿠젤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아델린은 죽은 자들의 넋을 정성을 다해 위로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아델린 드몽은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녀가 제작한 관은 아름답고 화려했으며 수의는 간소하면서도 멋들어져 외출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물론 외출복으로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게다가 그녀에게 장례식을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한 마디 한마디가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처럼 영롱하기 그지없는 시로 된 조문을 써 보내곤 했는데 이 조문을 낭독하는 것을 듣는 조문객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그 정성스럽고 세련된 단어의 선택과 기가 막힌 흐름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물론 장례식이니까 아무리 울어도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라피드 쉬르쿠젤 마을과 그 인근에서는 아델린 드몽의 장의사에서 장례를 치뤄드리는 것이 부모에 대한 크나큰 효도였다. 물론 아델린의 장의사는 고급이었으므로 돈 좀 있다는 집이 아니면 거기다 장례 맡길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 아델린이 물귀신 여울 근처로 가서 혹시 레이첵이 발견되었는지 알아봐 주기로 했으므로 레이는 안심하고 라피드 쉬르쿠젤에 남아 세라비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가기 전에 아델린은 레이를 세라비 몰래 잠깐 불러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지금 그 여자가 없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지금 물귀신 여울로 가는 건 사람을 구하러 가는 게 아니라 시체를 건지러 가는 거라는 걸 알아야 하네. 그러니까 내가 죽은 사람을 살려갖고 올 거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말게.”
레이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주변에 혹시 누가 구조했을지도 모르니 잘 살펴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델린 드몽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만 몇 십 년을 관리한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그런 냉정함이었다.
“살펴봐 주기야 하겠는데 한마디 더 하자면, 당신네 배 부서진 지가 벌써 며칠이야? 그런데 아직까지도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 지나쳐. 내가 저 여자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봐서 큰소리로 말은 안 하겠는데, 시체라도 건지면 운 좋은 줄 알게.”
예술적인 감성을 지닌 장의사 아델린 드몽은 직원들을 데리고 물귀신 여울로 떠났다. 레이는 아직도 넋을 잃고 쓰러져 있는 세라비를 돌보러 별채로 돌아갔다.
레이는 아델린 드몽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은 한 마디도 세라비에게 하지 않았다. 레이 자신도 레이첵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간에 누군가 구조했다면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니, 아델린 드몽이 물귀신 여울에서 뭔가 찾아온다 한들 그것은 시체뿐일 것이었다.
아델린이 돌아올 때까지 레이는 세라비를 잘 돌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여주고 산책도 데리고 가고, 햇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는 꽃도 가져다 놓았다. 세라비가 레이첵이 뱃전에 쭈그리고 앉아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했기 때문에 레이는 세라비의 방에 긴의자를 갖다놓고 거기서 잤다.
이틀 후, 물귀신 여울로 떠났던 아델린 드몽이 마을로 돌아왔다. 그녀는 레이에게 자루에 싼 물건 하나를 넘겨주었다.
“이건…!”
“그래, 댁들이 찾는 사람 물건 같아서 가져왔어. 이게 어떻게 멀쩡하게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댁들 친구 물건 맞지?”
레이는 침통한 마음으로 자루에 싼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레이첵이 매일매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기록한 기록장이었다. 레이첵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록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장은 방수처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빗물이 스며들면 기록장이 상할까 봐서 벨벳으로 감싼 다음 밀랍을 입힌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기록장은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레이첵이 죽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 레이는 세라비에게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별채로 갔다.
방 안에는 레이가 세라비를 위해 가져다 놓은 꽃의 향기가 가득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가을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라비는 레이가 자려고 세라비의 방에 가져다 놓은 긴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레이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레이.”
그 레이는 없어진 레이첵이 아니라 레이였다. 레이첵은 더 이상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살았다면 지금쯤은 나타나야 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는 레이첵이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세라비였지만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해야만 했다. 이카레이유에 계신 삼촌과 숙모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두 분에게는 하나뿐인 자식이니 아마 오랫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첵의 죽음으로 인해 앞으로도 영원히 잘 살지 못할 사람은 세라비였다. 세라비는 자기가 레이첵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저리 가서 앉아있어!” 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좀더 친절한 말 한 마디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그 당시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조심해라.”라는 말 정도는 해 줘도 좋았을 텐데. 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괜히 레이첵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는데, 그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가 웬 자루를 하나 들고 와서 세라비가 주의를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뭐야?”
“세라비 님,” 레이가 말했다. “오늘 아델린 드몽 님이 물귀신 여울에서 돌아오셨어요. 이걸 전해주셨어요.”
“그럼… 레이첵은 못 찾은 건가?”하고 세라비는 중얼거리고 자루를 열어보았다. 레이첵이 생전에 정성들여 쓴 기록장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세라비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레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라비 님,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물귀신 여울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거기는 왜? 이제 가봐도 소용없잖아. 아델린 드몽 님도 그냥 돌아 왔잖아!”
“세라비 님도 같이 가요.” 레이는 말했다. “내일 여울 근처에서 레이첵 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낼 거래요. 그런 다음 우리도 여길 떠나야죠.”
“떠나? 어디로 가는데?” 세라비가 물었다.
“파렌베르크에 가서 게로스 왕을 만나야죠. 잊으셨어요?”
세라비는 벌떡 일어나서 레이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레이는 갑자기 얻어맞고 세라비를 쳐다보았다.
“너는!” 세라비는 소리쳤다. “레이첵이 죽었는데 넌 그런 생각이 나? 레이첵도 없는데 파렌베르크에는 가서 뭐해!” 세라비는 사촌의 기록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레이는 세라비를 달래지도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뭘 하실 건데요, 세라비 님? 집으로 돌아가시게요?”
세라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레이는 세라비에게 맞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라도 생기지 않았나 하고 벽난로 위에 걸린 거울을 흘끗 보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세라비 님. 어차피 저는 세라비 님이 원해서 오신 게 아닌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 가면 어디로 가실거죠? 브뤼메 산맥을 다시 넘어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브뤼메 산맥 얘기가 나오자 세라비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제서야 거기를 넘어왔는데 다시 거기를 넘어서 이카리아로…? 다시는 못할 짓이었다.
“마르벤으로 가면 돼.”
레이는 코웃음쳤다. “그래요! 좋은 생각이네요. 저는 국경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그 이상은 저도 같이 가드리지는 못하겠어요.” 말을 마친 레이는 정말로 짐을 꾸리려는 듯이 구석으로 향했다.
세라비는 부아가 치밀어서 “이제 사신도 아니니까 의심받을 것도 없잖아!”하고 레이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레이는 휙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저희는 칼베르에서 발행한 국경통과 허가증이 없어요.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오지도 않은 이카리아 사람인 저희에게 그걸 주겠어요? 세라비 님이 가신다면 저도 안 말려요. 하지만 전 안 가겠어요.”
“넌 나 지켜준다고 그랬잖아! 오스틴 병사들이 나한테 덤비면 네가 마법으로 지켜줘야 할거 아니야!”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소리만 하세요 세라비 님?” 레이가 차갑게 말했다. “세라비 님은 이제 템푸스 아르카에서 검술도 배우셨으니 혼자 힘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잖아요? 이렇게 말도 안되는 걸 우기는 분인 줄 알았으면 저도 처음부터 안 따라오는 거였어요.”
“그래, 그럼 가!”하고 세라비는 소리쳤다. “나 혼자서 이카리아로 돌아갈 테니까. 넌 이 나라에서 뭐 하고 살 건데?”
“저야 당연히 세라비 님이 내팽개친 사신의 임무를 다해야죠.” 레이가 대답했다. “저도 이카리아 사람이고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든 사신단의 일원이에요. 제가 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하지만 사신단의 대표는 나야! 네가 내 허락도 안 받고 무슨 수로 하겠다는 거야?”
“수가 있죠. 세라비 님은 방금 임무를 집어 치웠잖아요. 그러니 대표 자격이 없죠.” 레이는 조소하듯이 덧붙였다. “게다가 잊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브레스부르 수도원에는 아직 왕자님이 계세요. 우리나라의 왕위 계승자인 왕자님을 사신단에 참가하게 허락한 분이 누구죠? 왕자님을 무사히 이카리아로 돌려보내지 못하면 죽는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거 알고 계시죠?”
세라비는 분노로 끓어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세라비가 아무리 다 집어치우고 이카리아로 돌아가 버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세라비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레이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세라비를 몰아붙여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레이는 긴의자에 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세라비에게 다가와 아까보다 훨씬 다정하게 말했다.
“세라비 님, 결정은 세라비 님이 하시는 거예요. 마음을 정하실 때까지 우선 불쌍하게 죽은 레이첵 군의 영혼을 위로하러 가는 게 좋겠어요. 오늘 저랑 같이 물귀신 여울에 가실 거죠?”
세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정하실 때까지’라고 했지만 세라비가 레이를 따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음을 레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