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예술적인 장의사 아델린 드몽은 매년 한두 번씩 물귀신 여울로 가서 거기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곤 했다. 아델린은 그 제사를 이번에 올리기로 했다. 그래서 세라비와 레이는 장의사 직원 대여섯과 제사 지내는 무녀를 대동하고 물귀신 여울로 가게 되었다.
여울이 가까워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콰르릉거리며 땅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레이가 무녀에게 물었다.
“이게 바로 물귀신 여울 소릴세! 가까이 가서 보면 평생 못 잊을 테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보라구.” 무녀가 대답했다.
아델린 드몽이 어제까지 캠핑하던 장소인 듯한 평평한 자리에 장의사 직원들이 튼튼한 천으로 큰 천막을 쳤다. 레이는 세라비를 데리고 물귀신 여울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갔다. 바위투성이의 벼랑 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예쁜 글씨로 《 한 번만 더 생각을! 》이라고 쓰인 팻말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물론 생을 마감할 생각으로 여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이미 천 번도 더 심사숙고한 끝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런 귀여운 팻말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써놨으면 뛰어내리려다가도 화가 나서 돌아설 텐데.’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여울은 폭이 넓고 깊어 보였다. 엄청난 물살이 깔때기 모양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소용돌이 사이에 날카로운 바위들이 언뜻언뜻 보이며, 평소에는 평범한 급류에 불과하다가 며칠 전과 같이 폭우가 내리거나 하면 무서운 속도로 소용돌이치며 쇳덩어리가 떠내려와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는 물귀신 여울의 명성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환경을 사랑하는 아델린 드몽의 얘기로는 쿠젤 강의 물은 이 여울을 거치며 걸러져 깨끗해진 다음 성스러운 수도인 파렌베르크로 흘러간다고 했다. “비가 내린 지 며칠 됐으니 내일 아침에 제사 지낼 때쯤엔 잠잠해질 걸세.”라고 아델린은 덧붙였다.
세라비는 여울을 바라보며 레이첵의 기록장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집 떠나 다른 데 가보고 싶다고 브뤼메 산맥까지 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데서 죽다니…” 세라비는 울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레이는 그만 가자고 세라비를 끌어당겼다. 제사 지내는 무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천막 안에 마련된 공간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장의사 직원들은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저녁도 짓고 밤새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도 넣었다.
“저녁이나 먹고 푹 자 둬. 내일 아침 해 뜰 때 제사를 지내야 하니까, 그때 못 일어나지 말고…” 무녀가 말했다.
그러나 무녀는 내일 아침의 제사를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단식하는 무녀를 위해 장의사 직원들은 저녁을 빨리 먹고 다 치워버렸다.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직원들만 빼고 모두 천막으로 들어가 담요 하나씩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레이는 제일 깨끗한 담요를 맡아 놨다가 세라비에게 내밀었다. 세라비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천막으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레이도 그 옆에 담요를 둘둘 말아 덮고 누웠다. 세찬 물소리와 모닥불의 탁탁 튀는 소리를 배경으로 몇몇 직원들의 코 고는 소리만이 밤의 고요를 조용히 뒤흔들고 있었다. 레이는 뒤척거리다가 한참 후에 겨우 잠이 들었다.
한참 잠결을 헤매던 레이는 누군가 쿡쿡 찌르는 바람에 잠이 깼다.
“레이!”하고 세라비가 조그맣게 불렀다. 레이가 일어나 보니 세라비는 덮고 자던 담요를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나랑 같이 여울에 나가자. 너도 같이 가야 되지 않아?”
“저도 같이 가야 한다니요?” 레이가 물었다.
“내가 혼자 여울에 가면 뛰어내릴까 봐 걱정이 될 테니까 같이 가도록 허락해 주는 거야. 싫으면 나 혼자 간다.”하고 세라비는 일어나서 천막 밖으로 나갔다. 레이는 옆에 뉘어놨던 지팡이를 재빨리 주워 들고 세라비의 뒤를 따라 나갔다.
《 한 번만 더 생각을! 》 팻말 앞에서 세라비는 멈췄다. 주위는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세라비는 여울이 잘 보이는 널찍한 돌 위에 앉아 담요를 얼굴까지 둘러쓰고 무릎을 끌어당겼다. 레이도 그 옆에 앉았다.
물은 여전히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세라비는 품에서 레이첵의 기록장을 꺼내 펼쳤다.
“레이, 어두워서 책이 안 보여. 불 좀 켜봐.”
레이는 지팡이를 장대처럼 땅에 꽂았다. 지팡이 끝에 하얀 불빛이 맺혔다.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빛나 마치 쬐면 따뜻해질 것 같은 불빛이었다.
“이것 좀 봐, 레이.” 세라비가 기록장을 레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우리가 처음에 이카레이유의 삼촌 집에 도착한 날 얘기야. 얘는 그때부터 이미 기록을 하고 있었나 봐. 레이는 뭐든지 기록하기를 좋아해. 서기가 되기 전에도 그랬어. 할아버지처럼 작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세라비는 레이첵이 자세히 적어놓은 사건들을 읽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이카레이유에 돌아갈 때까지 내가 이어서 적고 싶은데 나는 글솜씨가 없어서 걱정이야. 이카레이유에 돌아가면 출판을 알아봐야겠어. 할아버지가 잘 아는 출판사가 있을 거야. 이건 내가 오델 몽테에서 괴물하고 싸울 때 얘기야. 얘는 이때 나 도와줄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적고만 있었다니까!”
레이는 묵묵히 앉아서 세라비가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세라비는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힘이 빠져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서 마법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춰주는 여울을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세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야, 난 이제 어떡하지? 레이첵은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걔가 없으니까 난 인제 완전히 혼자가 됐어. 이카리아에 돌아가도 외로워서 못 살 거야!”
말을 마친 세라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레이는 세라비가 울게 내버려 두었다. 한참 후에야 세라비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자 레이는 지팡이를 흔들어 빛을 껐다.
“레이, 넌 형제 있어? 동생이나 누나나 형이 있을 거 아냐. 집 떠난 지 오래됐을 텐데 안 보고 싶어?”
“전 라마야나 스승님이 가족이었어요.”
레이는 짧게 대답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라비는 레이의 지팡이와 템푸스 아르카의 집이 라마야나의 유물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적어도 세라비는 이카리아에 돌아가면 삼촌 세르비카 경과 클레망스 숙모, 그리고 르비뇽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괜찮아요.” 세라비가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는데 레이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세라비에게 주었다. “그 담요 남의 물건이니까 여기다 닦으세요.”
세라비는 레이의 손수건에 눈물을 닦고 코도 풀었다. 그러다가 세라비는 문득 생각나서 이렇게 말했다.
“레이,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동안 구박은 했지만… 미워서 그런 건 아냐.”
레이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세라비는 하도 울었더니 이제는 졸렸다. 그래서 세라비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훌쩍거리며 잠이 들었다. 레이는 세라비가 기대도록 해주고, 이번에는 진짜로 따뜻하게 열을 내는 은은한 불을 지팡이 끝에 맺히게 했다. 머리 위의 별들이 하늘을 돌아 서쪽으로 떨어질 때까지 세라비는 그러고 앉아서 오랜만에 곤히 잠을 잤다.
동녘이 훤하게 터 왔다. 제사 지내는 무녀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천막 쪽에서 들렸다. 곧이어 “없어졌습니다!”하는 장의사 직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라비와 레이가 천막 안에 없는 것을 알고 찾는 소리였다. 절망한 나머지 둘이 손잡고 물속에 뛰어들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천막 주위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레이는 아직도 자고 있는 세라비를 황급히 깨워서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을 걱정시키다니 제정신이야?!”
무녀는 벌컥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매듭술이 잔뜩 달린 방울꾸러미를 흔들었다. “사람 수 맞춰서 제사 음식 준비해 왔는데 두 명이나 더 죽으면 수호령님이 노하셔!”
장의사 직원도 화를 내며 말했다. “죽을 생각이었으면 미리 저희한테 말씀을 하셨어야죠! 저희도 준비할 게 많단 말입니다.”
세라비는 잠시 말이 없다가, 레이를 끌어당겨 천막 뒤로 갔다.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레이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레이야, 우리,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살자…!”
이 말을 들은 레이도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 저런 소리까지 듣고도 죽으면 짐승이죠! 우리 반드시 살아서 이카리아로 돌아가요!”
“또 어디 갔냐! 제사 지낸다 이제!”하고 그렇지 않아도 어제저녁부터 굶어서 더욱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던 무녀가 멀리서 소리쳤다. 세라비와 레이는 재빨리 무녀에게 달려갔다.
영혼들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사방에 매듭술과 방울을 달아 놓은 제단 위에는 바구니에 가득 담긴 흰 꽃과 물을 상징하는 푸른 실타래, 그리고 물결무늬가 새겨진 청동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무녀는 깨끗한 물을 청동 그릇에 따랐다. 장의사 직원이 향을 피우자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레이첵이 지니던 소지품은 기록장밖에 없었으므로, 세라비는 기록장의 빈 페이지를 조금 잘라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무녀는 기록장 조각을 불에 태워 그 재를 청동 그릇에 담긴 물 위에 띄웠다. 그리고는 매듭술이 달린 방울꾸러미를 요란하게 들며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빛이 방울꾸러미에 반사되어 빛났다.
“여울을 지키는 수호령이시여! 우리 마을을 지켜주시는 영험한 수호령이시여! 여울에 빠져 죽은 영혼들을 돌보시는 자애로우신 수호령이시여!”
무녀는 작게 부르면 수호령이 노하시기라도 하는 듯 목이 터져라 수호령을 외쳐 부르고는, 이어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비단 주머니에서 꺼낸 재색 가루 같은 것을 공중에 흩뿌렸다. “불쌍한 영혼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소서!”
이윽고 레이첵의 이름을 부르며 가루를 뿌리던 무녀는 갑자기 제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의사 직원들이 달려왔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무녀의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은 창백했다. 장의사 직원들이 무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사자의 가루가 안 날린다.” 무녀는 이렇게 말하고 비단 주머니에서 다시 가루를 꺼내 레이첵의 이름을 부르며 공중에 날렸다. 가루는 공중에 날리는 대신 땅바닥으로 묵직하게 투둑 떨어졌다.
“이 사람, 안 죽었나 보다.” 무녀가 다시 중얼거렸다.
세라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녀를 바라보았다. “안 죽었다고요?”
무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청거리는 세라비를 레이가 붙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다가닥다가닥 하고 들려왔다. 장의사 직원 하나가 외쳤다.
“아델린 드몽 님이야!”
과연, 장의사 직원들의 귀는 주인을 알아보았다. 예술적 감성이 느껴지는 멋진 승마복을 입은 아델린 드몽이 붉은 갈기를 가진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날렵한 몸짓으로 말에서 내리자 장의사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아델린?” 무녀가 물었다. “오늘 제사엔 안 온다고 했지 않나?”
아델린 드몽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예술적인 미소를 짓고는 무녀 쪽을 향해 말했다. “이런 소식은 빨리 전해야 할 것 같아서 급히 달려왔죠.” 아델린은 그러고 나서 세라비에게 거친 종이로 만든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누군가 자네를 찾고 있어서 말이야.”
세라비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속에 든 편지를 꺼내 읽었다.
“레이첵의 편지야!”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