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랜베리를 줄까, 초코칩을 줄까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신전의 잔해를 치우는 일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샤토 데쥬 마을에서 지원이 왔고, 파렌베르크에서도 실종된 왕과 이카리아 대사를 수색하도록 수색대를 보냈다. 파렌베르크에서 온 마법사들은 신전 터와 주변 계곡에 마법으로 빛을 밝혔다. 항상 안개가 자욱하니 낮에도 밤 같던 창조신전은 이젠 밤에도 낮처럼 환해졌다.
솔렌의 방 주변의 잔해는 게로스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정리되었다. 잔해 밑에서는 게로스도 세라비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코린은 절망했다. 왕이 실종되었으니 국가급 재난이었던 것이다.
코린은 레이에게 다가갔다. “브리엘 부대사님, 이 보안장벽은 대사님의 스승이신 라마야나님께서 치신 것이니 대사님께서 아실 수는 없습니까? 폐하는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레이는 잔해를 치우는 것을 감독하며 머릿속으로 가능한 모든 가설을 검토하고 있었다. 장벽은 운이 좋아 라마야나의 보안 마법으로 걷어냈지만, 파렌베르크의 마법사가 잘못 시전한 파괴 마법으로 뒤틀린 장벽에 의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보내졌을까? 일단은 솔렌의 방 주변 잔해 밑에서 안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밑에 깔리진 않은 것 같았다. 불안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한 다행이기도 했다. 게로스와 세라비가 잔해 밑에 깔렸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텐데, 왕이 죽었다면 칼베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파괴 마법을 잘못 시전해서 신전을 무너뜨린 마법사는 도망치거나 자살하지 않도록 사제들이 머무는 별채의 한 방에 가두어 놓고 감시 중이었다. 레이는 그를 찾아가서 그가 마법을 사용할 때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물었으나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사실 신전이 모두 무너질 만큼 어마어마한 마법도 아니었다. 그냥 재수 없게 장벽의 힘과 잘못 충돌한 것뿐.
칼베르의 정보국장이자 왕의 최측근인 코린 같은 사람조차 이제는 레이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고 매달리고 있었으므로 레이는 무언가 해야만 했다. 레이는 일단 게로스와 세라비가 장벽으로 빨려 들어가 어딘가로 이동했다면 외국처럼 아주 먼 곳으로 보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 혹은 아직 치우지 않은 잔해 밑에 있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레이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파렌베르크에 도착한 후 뤼미에르관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때, 템푸스 아르카에서 들고 온 마법책을 뒤적이다가 떠오른 마법이 하나 있었다. 뤼미에르관 안에서 테스트할 때는 잘 됐었는데, 여기에서도 들을까?
레이는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잡고, 한 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들어 올렸다. 지팡이의 주위를 돌고 있던 소용돌이치는 바람 하나가 빛의 꼬리를 끌며 레이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레이는 생각을 집중하여 게로스와 세라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레페리오 일리오스… 그들을 찾아.”
바람은 다시 빛의 잔상을 길게 끌며 공중으로 사라졌다. 코린도 도미니크도 사제와 마법사들도, 그리고 근처에서 잔해 제거 작업하던 사람들도 다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빛의 소용돌이는 다시 레이의 손바닥 위로 돌아왔다. 레이는 한숨을 쉬고 소용돌이를 다시 지팡이로 돌려보낸 다음 코린에게 말했다.
“두 분 다 이 근처에 안 계십니다. 일단은 잔해 밑과 주변 계곡에는요.”
코린은 안심해야 하는지 울부짖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그 빛나는 것으로… 사람도 찾을 수 있는 겁니까?”
“찾을 수는 있는데 아주 멀리까지는 못 갑니다. 경께서 잔해 제거 감독을 계속해 주시면 폐하와 세르비카 대사님은 제가 이 근방을 이동하면서 찾아보겠습니다.”
코린은 동의했다. 마을에서 온 행정관이 달려와 샤토 데쥬 마을과 신전 인근의 지도를 펼쳤다.
“이 커다란 녹지 표시는 뭔가요?” 레이는 신전이 지어진 계곡과 맞닿은 구역을 가리키며 물었다.
“브레보뉴 숲입니다. 칼베르에서 가장 큰 숲입니다.”
“이 숲에 있다면 찾을 수 있을까요? 여기 사람도 삽니까?”
“이 숲은 전체가 벌목 금지 구역이라 마을은 없습니다. 숲 가장자리 쪽엔 그래도 버섯 따러 들어가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너무 넓어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을의 행정관이 말했다.
레이는 지도를 말아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신전에서 사라졌으니 신전 가까이에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찾아보죠. 바로 수색대를 보내 주십시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게로스는 축축한 이끼와 젖은 낙엽 사이에서 눈을 떴다. 숨을 들이쉬자 흙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하늘 대신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로스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도 없이 늘어선 나무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땅은 온통 낙엽과 오래된 나무껍질로 덮여 있었다.
신전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디일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솔렌의 방에서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걸쳐져 있던 장벽이 푸른빛으로 크게 일렁이고 일그러지며… 그렇다. 세라비가 먼저 휩쓸려갔었다. 게로스는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저만치 커다란 참나무 둥치 밑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세르비카 대사였다. 게로스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세라비의 머리카락과 얼굴에는 낙엽과 흙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었다.
게로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런 숲 속에 혼자 남겨지는 것은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사양이었다. 게로스는 장벽이 일그러지며 파도처럼 덮쳐 올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세라비가 먼저 휩쓸려갔고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코린이 손을 내밀며 “폐하!”하고 외치던 목소리도 기억이 났다. 그러니 코린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대사님, 세르비카 대사님!”
세르비카 대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이 분은 이 와중에도 설마 꿀잠 중인가? 하고 게로스가 생각하고 있을 때 세라비가 눈을 떴다.
“으앗!”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게로스의 얼굴이 보여서 세라비는 당황하여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게로스는 세라비의 어깨를 받치고 손을 잡아 상체를 일으키도록 도와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얼굴을 보고 그렇게 놀랄 것 까지야…’ 게로스는 민망하고 머쓱해서 코린이 일전에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그가 세르비카 대사를 요새 좀 많이 쳐다보고 있다고 했으니 세르비카 대사도 아마 눈치챘을 텐데, 빨리 누군가 나타나서 이 어색한 상황을 좀 무마해 주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여긴 어딘가요?” 얼굴에 붙은 낙엽과 흙을 털어내며 세라비가 물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신전도 보이지 않고요. 일어날 수 있으시겠습니까?”
세라비는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처럼 쑤시는 몸을 일으켜 게로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팔을 휘둘러보고 다리를 움직여 본 결과 부러지거나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요?”
게로스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신전 도착 기준 서너 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신전에 도착한 것이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나 세라비의 상태로 보아 하루 이상 기절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루 이상 쓰러져 있었다면 요새같이 아침저녁 기온이 낮을 때 저체온으로 사망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전에서 여기로 떨어진 지 한두 시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와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죠.”
두 사람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코린, 레이, 도미니크 등을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없었다. 높은 나무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희만 있는 것 같네요.” 세라비가 지쳐서 나무뿌리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치만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까요?”
숲은 굴곡이 거의 없는 평지였다. 차라리 산이었다면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세라비는 지금 이 상황이 브뤼메 산맥을 지날 때보다 더 좋지 않다고 느꼈다. 그때는 적어도 자신들의 위치와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로스는 나무들이 조금 듬성하게 나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재 시간과 해 위치를 보러 간 것이었다. 해는 살짝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큰 숲이 있다면 아마도 여기는 신전 근처의 브레보뉴 숲일 거라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벌목을 허용할걸…” 게로스는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브레보뉴 숲은 말이 숲이지 면적이 엄청나게 넓었다. 웬만한 남작령만큼 컸다. 신전에 가까운 곳에 떨어진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한가운데라면 빠져나가는 데만도 며칠 걸릴 것이었다.
“제가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볼게요!” 세라비가 나무뿌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올라가다니 어디를요?”
“나무에요.”
“안됩니다. 위험해요.”
세라비는 자기가 앉아있던 곳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참나무, 너도밤나무, 서어나무, 기타 이름 모를 큰 나무들. 아무리 세라비가 동네에서 나무 좀 탄다고 이름난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큰 나무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중간까지 올라가는 건 자신 있는데! 하고 세라비는 두 주먹을 쥐었다.
“안된다고요.” 게로스는 세라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보고 나무 위로 기어코 올라갈 결심을 하는 줄 알고 다시 말했다.
세라비는 풀썩 주저앉았다. “저희 그럼 여기서 죽는 걸까요?”
‘감정 기복이 심하군. 희망에 넘쳤다가 금방 절망하고, 바쁘네.’ 게로스는 세라비의 풀 죽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 세라비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가방 찾아야 해요!”
“가방이요?” 게로스가 놀라서 물었다.
“저 가방 메고 있었거든요!” 말을 마친 세라비는 아까 쓰러져 있던 곳으로 쌩하니 달려갔다. 방금까지 기운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더니 움직일 땐 날쌔네, 하고 게로스는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세라비는 누워 있던 곳 주변을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낙엽더미 속에서 작은 가죽 크로스백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있어요! 다행이다!”
게로스는 가까이 다가가서 세라비가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보았다. 세라비는 가방을 열어 게로스에게 안을 보여 주었다. 가방 안에는 종이로 잘 싼 쿠키 몇 개와 작은 가죽 주머니, 손수건과 옷핀, 그리고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 돌은 뭐죠?”
“이건…” 세라비는 돌을 집어 들어 게로스에게 보여 주며 그리운 듯이 말했다. “저희 집 뒤 개울가에서 주워 온 돌이에요. 떠나는 날 아침에요.”
게로스는 돌멩이를 그토록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세라비는 돌을 소중하게 다시 가방 안에 넣고, 종이에 싼 쿠키를 꺼냈다.
“크랜베리가 좋으세요, 초코칩이 좋으세요?”
게로스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세라비는 “오트밀맛도 있었는데 깨졌네.” 하면서 가방을 뒤집어 과자가루를 털어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