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약속해 주세요

브레보뉴 숲 (2)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게로스는 세라비를 따라 바위 위에 앉아 세라비가 내미는 쿠키를 한 입 깨물었다(세라비가 이게 제일 안 깨지고 멀쩡하다면서 초코칩으로 주었다). 목도 마른데 물은 어디서 찾는담. 게로스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를 바랐지만 나뭇잎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좀 있으면 해가 질 겁니다. 내일 아침 해 뜰 때까지 머물 곳을 찾아야 해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빠져나가죠?”


“여기는 아마 브레보뉴 숲일 겁니다. 신전이 있는 곳이 숲의 끝자락입니다. 북쪽으로 가면 신전이든 마을이든 나오지 않을까요.”


“남쪽으로는 왜 가면 안 되나요?”


“남쪽 끝은 브뤼메 산맥입니다. 여기서 산 같은 게 안 보이는 걸 보면 산맥도 꽤 멀리 떨어져 있을 게 틀림없어요. 뭔가가 시야에 보일 때까지 일단 북쪽으로 가죠.”


해가 꽤 많이 기울어졌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숲 속의 공기는 점점 싸늘해졌으므로 게로스는 재빨리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아침저녁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기 때문에 게로스도 셔츠에 조끼, 그리고 두꺼운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세라비는 안에 부드러운 벨벳과 모직으로 된 드레스 - 게로스의 할머니 옷들 중 하나였다 - 를 입고 겉에는 주머니와 소매에 벨벳 장식을 댄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불만 잘 피운다면 최소한 얼어 죽을 복장은 아니로군,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불 피울 줄 아세요?” 게로스는 외교관이 설마 그런 걸 알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세라비는 가방을 다시 열어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거 부싯돌이에요.”


“부싯돌을 항상 갖고 다니시나요?” 뜻밖의 물건에 게로스는 ‘역시 특수훈련 받았군!’ 하며 물었다.


“저희 브뤼메 산맥 넘어왔잖아요. 항상 갖고 다녔어요.”


“이제는 필요 없는데도 갖고 다니시는군요.” 게로스는 잠시나마 또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서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가방에서 꺼내놓는 걸 깜빡해서요.”


게로스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세르비카 대사가 생각보다 생존력이 강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간 정신없는 면은 있었지만 이제 우린 어떡하냐고 울며 주저앉지는 않는 것을 보니 파렌베르크까지 찾아온 것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게로스는 바위 위에 앉아 쿠키를 씹고 있는 세라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세르비카 대사님, 저희는 반드시 숲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협력해야 하니, 잘 부탁드립니다.”


게로스가 무슨 국가 정상 회담급 협력 제안처럼 손을 내미는 바람에 세라비는 순간적으로 벅차오를 뻔했다. 그러나 세라비의 머릿속에는 파렌베르크에 도착한 이래 자신이 그동안 게로스에게 보였던 모습들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서 세라비는 게로스의 손을 잡고 악수하는 대신 저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협력 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게로스는 흠칫 놀라 손을 내렸다. ‘설마 내가 자기한테 자꾸 눈길 준 걸 깨닫고 주의를 주는 건가? 아무래도 여자분이시니 브리엘 부대사나 플로르 왕자처럼 친한 사람도 아닌 잘 모르는 남자하고 숲에서 밤을 새우게 생겼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떻게 안심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다음으로 세라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여기에서 생긴 그 어떤 일로도 저를 감옥에 가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게로스는 코린의 발언 이후 가장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세라비가 너무 비장해 보여서 게로스는 웃지도 못했다.


“감옥에 갈 만한 일을 하시려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나갈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협력해서 숲을 나가는데 갑자기 감옥에 왜 가요?”


담 넘은 걸 갖고 다그친 일 때문에 충격이 컸나?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역시 약속 못 하시는 건가요?”


“이카리아에서는 국민들을 어떻게 다루길래 일단 감옥 갈 걱정부터 합니까?”


“아무튼 그래도 약속해 주세요!”


세라비의 얼굴이 어찌나 비장하고 심각해 보였던지, 게로스는 웃지도 못하고 짐짓 진지하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합니다.”


세라비가 진짜로 안심하는 것을 보고 게로스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혹시 나 폭군 같은 이미지인가?’ 게로스는 그런 와중에도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세르비카 대사가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길래 저런 요구를 하지? 여기서는 무서워하지 않게 잘해줘야겠네.’


세라비는 몸을 일으켰다. “폐하, 잘 곳 찾는 거랑 식량 찾는 것 중 어느 거 하시겠어요?”


‘아니, 이렇게 빨리 적응을? 심지어 업무분담까지?’ 방금까지 감옥 갈까 봐 걱정하던 세르비카 대사가 갑자기 실무형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니 대사가 확실히 브뤼메 산맥에서 노숙 좀 하며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게로스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잘 곳은 제가 찾아보죠.”


“좋습니다! 그럼 이따가 여기서 만나요.” 세라비는 이따가가 언제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게로스는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고 있다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형이 평평해서 동굴이나 절벽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로스는 여기저기 살피다가 거대한 나무뿌리 아래 움푹하게 패인 곳을 발견했다.


‘정 다른 곳이 없으면 여기라도 와야겠네…’


게로스는 이곳저곳 더 돌아다녀 보다가, 아까 나무뿌리 아래보다 더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작은 바위언덕 아래 동굴처럼 움푹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위로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 아주 많이 오지 않는 이상 비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로스는 바닥을 손으로 짚어 습기가 많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음, 차고 있던 단검으로 주변의 나무에 표시를 하며 아까 세라비와 헤어졌던 장소로 돌아왔다.


세라비는 벌써 돌아와 있었다. 치맛자락에 뭔가 잔뜩 담아갖고 와서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었다.


“뭐가 그렇게 많아요?” 게로스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버섯이 많더라구요. 밤 하고 열매 같은 것들도 있어서 따왔어요. 먹을 수 있는 나무뿌리도 있는데 그건 못 캐왔어요.”


“왜요?”


세라비는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제가… 검을 안 가져왔거든요…”


“원래 검을 갖고 다니세요?”


“저 검 있어요. 여기 오는 길에 산 고대의 검이에요. 오늘은 설마 필요 없을 줄 알고 안 가져왔더니 꼭 그럴 때 쓸 일이 생기네요."


게로스는 웃으면서 세라비 옆에 앉았다. “맞아요. 필요 없을 줄 알고 안 갖고 나오면 그날 꼭 그거 쓸 일 생기죠.”


세라비는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폐하도 그런 일이 있으세요?”


“왜요? 저는 뭐 항상 완벽하게 챙겨갖고 다닐 것 같으세요?”


“완벽하게 갖고 다니실 것 같기도 하지만… 수행원한테 다 갖고 다니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


게로스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대답했다. “맞네요. 전 그러면 되죠.”


‘괜히 서민적인 척했나.’하고 게로스는 좀 아까 한 말을 후회했다.


“아무튼 전 형편없는 제자예요. 스승님께서 어딜 가든 검을 몸에서 떼지 말라고 하셨는데…” 세라비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이요? 누구신데요?” 의외의 단어가 세르비카 대사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며 게로스는 물었다.


그 순간, 세르비카 대사는 갑자기 게로스에게 몸을 돌리더니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 스승님… 라그랑쥬 님이요!”


“라그랑쥬 님이요?”


그로부터 해가 완전히 서쪽 하늘 아래로 넘어가 버릴 때까지 게로스는 라그랑쥬 스승님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시고 날쌔시고 검술의 동작은 얼마나 유려하며 손바닥은 얼마나 맵고(이건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정원도 잘 가꾸시고 약초도 잘 다루시고 인품은 또 얼마나 훌륭하신지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게로스는 중간에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잠자코 세라비의 라그랑쥬 스승님 자랑을 들으며, 원래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하고 놀라워했다.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고… 하면서 라그랑쥬 스승님 에피소드를 늘어놓던 세라비는 갑자기 흡! 하면서 말을 멈췄다.


‘돌아가신 스승님이 그리워서 갑자기 울컥한 건가!’ 게로스는 세라비가 울음을 터뜨리는 줄 알고 순간 긴장했다.


“목말라요.” 세라비가 말했다.


게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 놀래라, 이 분 진짜 사람 헛갈리게 하네.’


“그새 어두워졌네요.” 세라비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라그랑쥬 스승님 아직 건강하신 것 맞죠?” 게로스는 앞으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세라비의 말하는 태도로 보아 왠지 건재하실 것 같긴 했지만.


“저보다 오래 사실지도…” 세라비가 중얼거렸다.


게로스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이제 갑시다. 여기 앉아있으면 안 돼요. 잘 만한 곳 찾았으니 거기로 가죠.”


세라비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기운이 빠졌는지 순순히 게로스를 따라왔다. 주변이 깜깜해서 아까 게로스가 나무에 표시를 한 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게로스는 방향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횃불의 불빛에 비춰 표시된 나무들을 따라 아까 게로스가 찾은 바위 밑 움푹한 곳으로 갔다. 세라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잘 찾으셨네요!”하고 감탄했다.


세라비는 부드러운 이끼와 나뭇가지, 낙엽 등을 모아 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게로스도 큰 돌 몇 개를 주워 둥글게 둘러쌓아 놓고 그 안에 낙엽과 나무를 넣어 불을 피웠다.


“버섯은 구워서 먹는 건가요?” 게로스가 세라비가 모아 온 버섯과 밤 등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구우면 돼요.”


“독버섯 아닌 건 확실한 거죠?”


“저는 라그랑쥬 스승님한테 약초학 개론을 배우면서 독버섯과 먹는 버섯 구분도…” 세라비는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이번에는 왜요?”


“목말라요…” 세라비가 다시 기운이 빠져서 말했다.


“물도 찾아야 해요. 일단 아까 따오신 열매 같은 거라도 먹죠. 수분보충은 될 것 같으니.”


세라비는 나무열매를 가방 안에 있던 손수건으로 슥슥 닦아 게로스에게 내밀었다. 열매는 단맛보다 신맛이 더 많았지만, 즙이 많아 갈증을 어느 정도 채워 주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두 사람 분의 잘 자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희 교대로 자야 하니까 굳이 그렇게 넓게 안 만드셔도 됩니다.”


“아 맞다. 항상 두 명씩 교대로 자서 습관이 됐었네요.”


세라비는 넓게 퍼뜨려서 깔았던 이끼와 낙엽을 다시 그러모아 한 사람 누울 자리로 만들었다. 게로스는 ‘저분은 그럼 내가 얘기하기 전까지 나하고 나란히 누워서 자려고 했단 말인가? 감옥에 안 보낸다는 약속을 받자마자 경계심이 저렇게 없어질 수도 있나.’하고 잠시 당황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왕이고 남자라 해도 그냥 생존 동료로 보는구나. 다행이다.’

Geros-Seravi-모닥불.png 밤의 숲 속, 게로스는 모닥불을 피우고 세라비는 이끼로 잠자리를 만든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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