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보뉴 숲(4)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사실 저는 진짜 외교관이 아닙니다.” 세라비는 각오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자기가 원래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이며 삼촌이 장손의 임무를 하라고 억지로 끌어내서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게로스는 세라비의 비장한 고백을 들으며 세라비가 처음 도착해서 인사말도 틀리던 모습과, 이제까지 왔었던 사신들과는 달리 격식도 없고(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긴 했다) 별궁 도서관에서는 자기가 농촌에 산다고 말했던 것 등을 떠올렸다. 그래, 마르셀 왕이 아무리 허술한 왕이라 해도 너무 이상한 사신을 보냈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 이상한 사신도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대사님은 세르비카 집안의 장손이시라는 거죠?” 게로스는 세라비의 얘기 주제를 조금 빗나가게 해서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이렇게 물었다.
“네, 저희 나라는 결혼해도 여자 성이 안 바뀌기 때문에 장남이든 장녀든 장손이 될 수 있어요. 자녀는 어느 쪽 성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고요.”
장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칼베르의 왕인 게로스는 ‘장손이 뭐라고 집안 명예까지 책임지게 하나.’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나라와 이카리아는 오래전에 한 나라였는데, 이젠 많이 다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세라비는 이야기를 마치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렸으니 이제 나를 비웃을까?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할지도… 그치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런 얘기를 뭐 하러 왕한테 다 해버렸는지는 세라비도 자신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마도 숲에 떨어진 이후로 게로스가 여러모로 편하게 해 줬기 때문일 거라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진짜 외교관이 아니라고 하셔서 무슨 말씀인가 했네요. 진짜 외교관이 뭐 별거 있나요? 왕이 임명하고 파견서에 인장 찍어 보내면 진짜 외교관인 겁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게로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외교관 처음 해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어려운 임무를 주시다니, 세르비카 경은 대사님 삼촌이시라면서 너무 가혹하신 것 같네요. 조카라면 좀 더 편한 곳에 보내고 싶으셨을 텐데요.”
세라비는 고개를 들고 게로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다’만 생각하느라 ‘처음부터 어려운 일을 시켰다’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려운 임무요?”
“오시는 길이 굉장히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포르트메르로 들어오려다가 실패해서 산을 넘으셨다면서요. 저는 아무리 믿을 만한 외교관이라도 그렇게까지는 못 시킬 것 같습니다.”
“그건…” 세라비는 삼촌이 실제로 ‘브뤼메를 넘어라’라고 시킨 적은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 말을 흐렸다.
“첫 임무로 이렇게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맡기신 걸 보면 세르비카 경이 엄청 신뢰하시나 봅니다.”
“신뢰해서가 아니라,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그러신 거였어요.”
“가다가 실패하면 안 보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대사님이야말로 삼촌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제가 아는 세르비카 경은 절대 일을 허투루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라비는 삼촌을 잔소리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로스의 이런 평가가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삼촌이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그냥 잔소리의 일부라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중요한 임무를 해낼 만한 사람이어서 보낸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라비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말 꺼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백하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근데, 제가 얘기하고 나면 폐하도 실망할 만한 얘기를 해준다고 하셨잖아요.”
게로스는 후회했다. 세라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님, 사실은 저도 대사님이 실망하실 얘기가 진짜 많거든요.“ 게로스는 일부러 비장한 척하며 말했다. “어느 걸 말씀드려야 할지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무시고 계시면 그동안 생각해 놓을게요.”
세라비는 ‘세상에…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뭐 실망할 게 그렇게 많을까?’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자리에 누웠다. 게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모닥불을 뒤적였다. 잠시 후, 세라비를 돌아보니 그새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 잠든다고?’
게로스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고 있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 생각해서 다시 모닥불로 눈을 돌렸다. 세라비가 어찌나 잘 자는지 차마 깨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세라비는 동이 틀 때까지 아주 푹 잘 수 있었다.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세라비는 저절로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동이 트려는지 희미하게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세라비는 찌뿌드드한 몸을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헉!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로스는 잠들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모닥불 곁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 폐하! 왜 안 깨우신 거예요? 제가 혹시 깨워도 안 일어났나요?”
브뤼메 산맥을 넘어오면서 아무리 잠에 곯아떨어져 있어도 레이나 레이첵은 자기네가 잘 순서가 되면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게로스도 당연히 자기 잘 차례가 되면 깨워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일어난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잘 주무셨나요?”
세라비는 벌떡 일어나 게로스가 잘 수 있도록 잠자리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말했다. “안 일어나면 발로 차서 깨워도 되셨는데…!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이시겠어요?”
“좀 있으면 해가 뜰 테니 움직여야죠.” 게로스는 세라비에게 물이 든 나무 그릇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한숨도 안 자고 어떻게 움직여요?”
“저는 가끔 그렇게 해서 괜찮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세라비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게로스를 쳐다보았다. 성인이 되어 세르비카 경의 후견에서 자유로워진 이후 언제나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삶을 살아왔던 세라비는 자신과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것 같은 게로스를 존경과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왕이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줄 알았는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지고 있는 짐이 많아 보일까? 잠도 잘 못 자거나 가끔은 아예 안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훈련장 가서 운동하고(이건 뭐 진짜로 운동을 좋아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파렌베르크에 도착한 지 이제 두 주일 됐으니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냥 언뜻 봐도 게로스는 하루 종일 바쁜 일정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반듯하고 항상 단정하고 항상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그치만… 좀 안 됐어.’
세라비는 어쩐지 게로스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처럼 마법을 쓸 줄 알면 뭐라도 보여줘서 위로해 줄 수 있었을까?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