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보뉴 숲 (5)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는 게로스를 도와 모닥불을 정리한 후 물그릇을 챙겨 들고 출발했다. 두 사람은 개울로 다시 가서 거기서부터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때문에 하나도 못 주무셨으니, 제가 뭔가 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게로스는 세라비가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하나 의심쩍어서 이렇게 말했다.
“뭘 해주시려고요? 설마 저를 업고 가실 건 아니시죠?”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세라비는 게로스 앞에 등을 대고 꿇어앉았다.
게로스는 또다시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제발… 일어나 주세요.”
“제가 딱히 잘하는 게 없어서, 이런 거라도…”
“대사님이 잘하시는 게 없다고요?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하나 있는데요.”
“뭔데요?”
“담을 좀 잘 넘는 편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가볍게 넘으시는 것도 제가 봤구요.”
세라비는 뤼미에르관의 담을 넘은 다음날 게로스가 찾아와서 독대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때는 무서워서 목소리만 들어도 땀이 배어 나오고 덜덜 떨렸는데 지금은 저분을 업고 걷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친근하게 생각되었다.
“담을 넘는 게 폐하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넘겠습니다!”
“네, 필요하면 반드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여전히 자신을 업을 태세인 것을 보고 일으키며 말했다. “대사님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를 두신 마르셀 폐하가 부럽네요.”
“코린 경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담을 넘을 겁니다!”
아마 그럴 거라고 게로스도 생각했다. 물론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그런데 대사님이라고 부르시니까 왠지 너무 어마어마하고 당장 외교문서에 서명해야 할 것 같아요.” 세라비가 무릎 꿇고 앉느라 옷자락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지금에 와서 갑자기요? 플로르 왕자님은 대사님을 뭐라고 부르시죠?”
“세르비카 양이요.”
‘누나처럼 대하더니 부를 땐 격식 엄청 차리네. 혹시 지금도 서로 말 안 하나?’ 게로스는 플로르가 세라비에게 싸늘하게 대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원인이 자신이긴 했지만 말이다.
“세르비카 양도 괜찮고 세라비도 괜찮습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이름만요? 그래선 안 되죠.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자고 한 거 잊으셨습니까? 제가 세라비라고 부르게 되면 대사님도 저에게 게로스라고 불러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어요?”
세라비는 숨을 몰아쉬며 게로스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네…? 폐하를 이름으로 부른다구요? 사형…! 사형이다!”
게로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물론 그 누구도 왕을 이름으로 부르진 않을 테지만, 사형은 또 뭐람.
"그럼 '세라비 님’은 어때요?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는 세르비카 대사님입니다.”
세라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레이도 저를 그렇게 불러요.”
게로스는 이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레이? 브리엘 부대사님 말씀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부대사님도 저를 그렇게 부릅니다.”
‘동료 외교관을 그냥 이름으로 부른다고? 생각보다 상당히 가까운 모양이네. 하지만 브리엘 부대사는 또 저분을 ‘세라비 님’이라고 부른다니, 이상한 관계로군.’
게로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르비카 대사와 브리엘 부대사의 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전부터도 두 사람이 직장 동료 치고는 서로 너무 편하게 대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부른다니, 레이첵 서기관이야 사촌이니까 당연하다 쳐도 이쪽은 대체 뭘까?
“좋습니다. 그럼 세라비 님,” 게로스는 세라비가 새로운 호칭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안심하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이번 임무가 처음이시면 브리엘 부대사님하고 같이 일하는 것도 처음이시겠네요?”
“레이… 브리엘 부대사님도 이번 임무가 처음이에요.” 세라비는 이카레이유로 가는 길에 프티 몽텔리의 술집에서 레이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왔다며 임무에 합류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라마야나 선생님의 제자였고, 그 임무는 칼베르에 오는 거였다고?’ 게로스는 운명도 계시도 믿지 않았고 더욱이 어릴 때 저주에 대한 문서를 발견한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외면해 왔었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라비는 레이에 이어 사촌인 레이첵도 따라오게 된 얘기를 들려주고, 이윽고 플로르 왕자의 합류에 대해서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플로르 왕자님은 게로스 폐하를 보고 싶다고 따라왔지. 왕자님은 내가 그런 얘기를 가볍게 입에 담는 걸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그리고 플로르 왕자님은 저희를 격려하기 위해서 같이 와 주신 겁니다.”하고 세라비는 말을 맺었다. 게로스는 어차피 플로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 말에 조금 감동했다. ‘어차피 이 사람들도 플로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절대 말하지 않는구나. 네 사람의 유대감은 내가 상상하는 이상일 것이다.’
게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브리엘 부대사와 세르비카 대사의 알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접어 두었다.
꽤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숲 말고 다른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혹시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개울의 폭이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그들이 이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숲은 햇빛이 들지 않아 서늘했지만, 오랫동안 걸어 땀이 나기 시작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코트를 벗어 어깨에 두르고 자기 할머니 옷을 입은 채로 길도 없는 숲 속을 힘차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덤불이나 쓰러진 나무에 가로막혀도 덤불은 게로스가 갖고 있던 단검으로 쳐내고(게로스는 세라비가 손이 다치지 않도록 장갑을 빌려주었다) 쓰러진 나무도 미끄러운 바위도 게로스가 손만 잡아 주면 치마를 입고도 어렵지 않게 잘 타 넘었다.
“실이랑 바늘을 갖고 왔어야 했는데.” 세라비가 여기저기 찢어진 치맛자락을 만지며 말했다.
“갖고 왔었으면 좋았을 게 한두 개가 아니니 생각하지 마세요. 그나마 숲 속에 혼자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잖아요.”
“그건 그래요.”
그날은 구름이 짙게 끼어 빨리 어두워졌다. 게로스는 어제 잔 곳보다 더 비를 잘 막아줄 수 있는 은신처를 찾아냈다. 다행히 바람은 건조했고 비도 오지 않았다. 세라비는 게로스가 오늘만큼은 편히 자게 해 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잘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단검을 빌려 어제는 검이 없어서 못 캐왔던 먹는 나무뿌리를 캐갖고 와서 자신이 라를르 마을 레스토랑의 셰프라고 상상하며 기가 막히게 구워 주었다.
“플로르 왕자님이 좋아하시는 거예요.”
“플로르 왕자님도 왕자로 태어나서 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셨네요.” 게로스는 구운 뿌리를 받아 들었다. 세라비가 어젯밤에 자기만 잔 것을 어떻게든 보상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고 있는 것을 게로스는 고맙게 여겼다.
구운 뿌리는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왕자가 이카레이유에 돌아간 다음에도 좋아할 만한 음식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오늘은 반드시 먼저 주무셔야 합니다.” 세라비가 비장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 혼자 주무신 것 때문에 미안해서 저 못 깨우시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절대로 깨워 드릴 테니 푹 주무세요”
게로스는 세라비에게 시계를 넘겨주었다. 그는 세라비의 가방을 베고 누워서 세라비가 모닥불 곁에 앉아 가끔 불을 뒤적거리거나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은 잔잔한 편이었지만 가끔씩 숲 냄새를 실은 바람이 불어와 불길을 흔들고 세라비의 머리카락을 공중에 날리게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이카리아 사신하고 숲 속에서 모닥불을 마주 보며 앉아 있다니, 이 모든 것이 꿈속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잠이 안 오세요?”
“너무 피곤하면 잠이 안 오기도 하나 보네요.”
게로스는 누군가 옆에 있을 때 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도 못 잔 상태로 하루 종일 걸은 탓에 금방 쓰러질 것처럼 피곤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모닥불이 흔들리는 것이, 그리고 모닥불 곁에 앉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이 보기 좋아서인 것 같았다.
“제가 그러면 잠이 잘 오도록 옛날얘기라도…!”
“아니에요. 잘 거니까 걱정 마세요.” 게로스는 세라비가 옛날얘기를 해준답시고 스승님 자랑을 다시 할까 싶어 황급히 말했다. “대사님 사시는 마을 얘기나 해 주세요.”
“세라비 님이라고 부르신다면서요.”
게로스는 정정했다. “세라비 님 사시는 마을 얘기요. 라를르라고 했나요?”
게로스는 누워서 모닥불과 그 너머의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라를르 마을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라벤더와 로즈메리가 핀 울타리와 햇빛이 잘 드는 넓은 마당, 석회칠을 한 하얀 벽에 붉은 테라코타 지붕을 인 마을의 집들, 가끔 시장이 열리는 마을의 광장에는 빵집과 과일가게와 치즈 가게가 있고, 근처 언덕에 있는 사원에서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려오는 마을. 강가의 저지대에는 포도 과수원이 있고 포도주도 생산되는데 세라비 말로는 솔직히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카리아에서 최고라고 했다(전국의 포도주를 다 마셔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신빙성은 좀 떨어졌다). 마을 곳곳에 자두와 체리와 사과나무도 있어서 동네 뒷산에 놀러 나가도 점심 먹으러 집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부터 마을에서 생산되는 우유가 진짜 맛있고 버터와 치즈는 풍미가 기가 막혀서 그걸로 만든 빵은 게로스도 반드시 먹어봐야 하니 나중에 자기가 이카리아로 돌아가면 꼭 보내 드리겠다고 했다(오는 동안 상하거나 썩겠지만 게로스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자기 마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너무너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지네.’
게로스는 세라비가 왜 가방에 돌멩이를 넣어갖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바람에 불길이 흔들리는 것을 점점 무거워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세라비가 들려주는 라를르 마을을 상상했다.
세라비가 한참 얘기를 하다 멈추고 돌아보니 게로스는 숨결도 고르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많이 힘드셨었구나.’ 세라비는 지쳐 보이는 게로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 마을 진짜로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