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랜드의 공포

그레이트 글렌 웨이 5일째

by 마봉 드 포레

[ 8월 8일, 여행 26일째, 그레이트 글렌 웨이 5일 ]

출발지: 포트 오거스터스(Fort Augustus)

도착지: 인버모리스턴(Invermoriston)

숙소: 인버모리스턴, 브라카리나 하우스(Bracarina House)

걸은 거리: 12km


아침을 먹으면서 오늘 날씨는 맑을 거라고 예보에 나왔다고 말하자 조식 시간에만 와서 일 도와주는 동네 여인네는 '그걸 믿냐?' 하듯이 코웃음 쳤다.


"그래도 올해 여름 괜찮았지?" 주인아줌마가 말하자 동네 여인네는 "좋았지. 5월에 한 10분 정도?"하고 대답했다(이 여인네 맘에 든다).


포트 오거스터스를 끝으로 인버네스까지 이제 운하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네스 호가 계속해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네스 호를 따라가는 오늘의 코스는 높은 길(High Route)과 낮은 길(Low Route)로 나뉜다. 이 아름다운 네스 호를 높은 데서 좀 더 잘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높은 길을 선택했다(왜 그랬을까?). 이렇게 높은 길과 낮은 길로 나뉘는 구간은 오늘 코스와 내일 코스뿐인데, 내일은 구간이 길기 때문에 높은 길을 걸으면 너무 힘들 테니 거리가 12km로 짧은 오늘이 높은 길을 걷기 적합한 날이었다.


숲 속의 가파른 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던 도중 세 사람과 마주쳤다. 그중 한 사람은 양봉업자처럼 그물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가파른 길은 초반에만 있고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드디어 나무도 없이 황무지 같은 평평한 길만 펼쳐진 산등성이를 호수를 내려다보며 쭈욱 걷게 되는 것이다. 시야가 트이자 경치가 어찌나 좋은지 너무 좋아서 깨춤을 췄다.


뭐! 산에서 깨춤을?

아무도 안 보니 상관없잖아! 실제로 사람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는 여러 개의 눈들이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높은 길에서 보는 풍경은 매우 멋졌다. 그것들만 없었어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었을 텐데...

바위 위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며 감자칩 한 봉지를 뜯어먹고 있는데, 눈앞에 까만 점들이 몇 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손을 저어 쫓았다. 팔 위에도 까만 점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 뭐지 이게?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으아아아아아앙뜨아아악갸아아아ㅏㄱ어쟏ㅇ고너뢈노ㅗㅓ아아아아아아악!!!!!

말로만 듣던, "하이랜드의 공포" 깔따구(Midges) 수천, 수만 마리가 바로 내 머리 뒤에 있었다.


너무나 많아서 손을 휘저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놈들은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겉에 입은 재킷은 물론이고 안에 입은 후리스 재킷 위에도, 바지와 배낭 위에도 심지어 머리 위에도 내려앉았다. 먹던 감자칩을 배낭 안에 넣을 새도 없이, 100미터를 20초에 뛰는 내가 이번만큼은 국가대표 육상선수 뺨 후려치게 뛰었다.

포트 오거스터스에서 인버모리스턴까지 가는 "높은 길"

옷에 붙은 나머지 놈들을 다 털어내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다음부터는 눈앞에 까만 거 비슷한 것만 보여도 소스라치게 놀라 팔을 휘휘 저으며 걸었다.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 반만 펴서 뭐라도 날아다닌다 싶으면 무조건 앞으로 뒤로 휘젓고 혹시 아까처럼 뒤쪽에서 공격해 올지 모르니 어깨 뒤쪽으로도 계속 휘저었다. 멈추면 소리 없이 다가오는 놈들이라 앉아서 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덕분에 원래는 스툴을 펴서 3보 1 휴식하며 간식을 먹던 내가, 싸 온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그 좋은 경치 감상도 못하고 발이 아픈 것도 잊고 인버모리스턴까지 딱 한 번 쉬고 정신없이 걷기만 했다.

평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난 길이다.

끝없이 펼쳐진 히드꽃과 풀만 자라는 산자락의 길에는 360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고사하고 양이나 소 같은 동물조차 없었다. 나는 원래 광장공포증이 있어서 내 키보다 더 높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확 트인 공간에서는 어지러움을 느끼는데, 이번에 깔따구 덕분에 극복한 것 같았다. 오로지 이 황무지를 어서 벗어나 인간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이 금방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제법 불었다. 바람이 센 것은 좋은 징조다. 깔따구는 바람이 3m/s가 넘으면 잘 날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얘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바람이 잔잔한 여름 저녁 무렵이다. 하지만 최적활동 습도 역시 90% 정도라 약한 비에 바람이 잔잔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래서 쏟아지는 비와 세찬 바람에 감사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내 생전 이렇게 비참한 꼴로 다니긴 처음이었다. 까마득한 저 아래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는데 탈 수만 있다면 당장 절벽에서 뛰어내려 나 좀 태워달라고 하고 싶었다.

길 끝을 봐도 사람 한 명 없다. 양도 없다. 염소도 없다.

길은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대체로 나쁘지 않았지만 올라갈 땐 꽤 가파르고 내려갈 땐 완만했다. 다른 길 다닐 땐 지나가는 사람도 은근히 많더니만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아마도 자전거가 못 다니는 '높은 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날이 개면서 호수랑 그 너머 언덕들이랑 밭 비스무레한 것이 내려다보인다

드디어 사람이 나타났다! 까마득한 저 앞에 노랑과 파랑 옷을 입은 사람 두 명이 보였다!!! 나무가 없어서 아주 멀리 있는 사람도 잘 보였다. 언덕 경사에 가려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길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저 사람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빨리 걸었다. 그래서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할 무렵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머리가 새하얀 호리호리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자기 꼴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가파른 오르막길이며 깔따구며 대체 뭐 하는 짓인지..."


할머니는 TWA 항공사(90년대에 미국에서 잘 나가던 항공사인 Trans World Airlines)의 승무원으로 일했었다고 했다. 지금 그 항공사 코드를 한국의 항공사가 쓰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IATA 2 letter 코드를 현재 한국의 티웨이항공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티웨이항공의 ICAO 3 letter code는 TWA가 아니라 TWB를 쓴다). 딸과 며느리와 셋이 같이 여행 중인 할머니는 최소한 나보다는 잘 걸었지만 인버모리스턴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은 좀 힘들어했다. 앞서 가며 기다리던 딸과 며느리는 "절대 절대 네버 네버 높은 길 안 간다! 내일은 무조건 낮은 길!"하고 맹세했다.


나 역시 이미 맹세한 뒤였지만 또다시 맹세했다. 경치고 나발이고 오르막길이 너무 힘든 데다 벌레 수천 마리에게 둘러싸이는 것도 인생에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집이 나타났다! 아아 드디어 인간이 사는 곳으로 내려왔다!

저 아래 사람!이 사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잘 불어 줘서 벌레는 없었다. 내리막길 중간에 탁 트인 누리끼리한 들판 앞에서 드디어 의자를 펴고 앉아 초코바를 먹으니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등산복 입고 연출할 뻔했다. 알프스에도 깔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멋진 돌다리가 있는 인버모리스턴 근처의 계곡

마을에 들어섰다. 스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도로와 포트 윌리엄 - 인버네스 간의 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인버모리스턴은 '호텔!'과 '가게!'와 무려 '카페!'가 있는 제법 번듯한 마을이다(다 한 개씩만 있음 주의). 4시까지 마을회관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구운 케이크와 차, 커피, 탄산음료 등을 팔고 그 옆에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잡다한 책들과 그릇, 컵, 유리잔 등을 파는데 그중 머그컵 두 개를 한 개당 50p씩 주고 샀다. 집에 갈 때까지 부디 깨지지 말기를. 수익금은 마을회관 유지에 보탠다는데 내가 낸 1파운드가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을의 가게(와! 가게다!). 건물 앞에 걸린 두 깃발은 스코틀랜드 국기(우측)과 Lion Rampant(Royal Banner of Scotland - 스코틀랜드 왕실 상징)

마을의 단 하나뿐인 호텔 식당에서 저녁으로 사슴 고기를 먹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사슴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는 바람에(얘네가 천적이 없고 들판은 넓어서 아주 지네들 세상이다) 농작물과 숲의 묘목들을 해치는 바람에 골칫거리라고 했다. 오죽하면 늑대를 다시 풀어야 한다는 의견마저 나온다고 했다(지금은 늑대가 없음). 하지만 그러면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하고 있단다. 그래서 사슴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

사슴고기와 아이언 브루로 저녁을 먹었다. 사슴고기 맛있음.

깔따구 덕분에 빨리 도착했는데 마을이 하도 작아서 할 일도 없었다. 마을 한 바퀴 돌고 나서(작아서 10분이면 돈다) 방에서 그냥 푹 쉬기로 했다. 부디 내일의 길은 험하지 않길...

인버모리스턴의 들판

토요일 연재
이전 21화네스 호의 괴물을 찾아! 보트 트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