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글렌 웨이 6일째
출발지: 인버모리스턴(Invermoriston)
도착지: 드럼나드로킷(Drumnadrochit)
숙소: 드럼나드로킷, 피들러즈 오크데일(Fiddler's at Oakdale)
걸은 거리: 22km(코스 중 최대 거리)
오늘은 전 구간 통틀어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 원래는 마지막 구간이 30km로 가장 긴데, 이걸 일정을 하루 더 늘려서 19km/11km로 나눠 걷는 옵션을 선택할 수 있다. 당연히 나는 하루에 30km를 걸을 자신은 없으므로 19/11 구분 옵션을 선택했다. 그러니 22km인 오늘이 코스 중 최장 거리이다.
어제 망할 놈의 깔따구들한테 쫓겨 도망가다 보니 포트 윌리엄에서 산 배낭 방수 커버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이 동네는 너무 작아서 배낭 커버 같은 것을 파는 곳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우체국이랑 겸하고 있는 작은 가게 하나, 저녁식사를 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역사 깊은 호텔 하나, 그리고 오후 4시에 문 닫는 카페 하나뿐이다. 혹시라도 비가 많이 오면 배낭이 통째로 젖을까 봐 큰 비닐봉지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ㅜㅠ
예보에 의하면 비는 안 안다고 하니(누가 믿을까만은...) 거리만 너무 길지 않다면 즐거운 걷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불길하게 처음부터 산길부터 시작하는 코스 진입로로 들어섰다. 오늘도 높은 길과 낮은 길이 있는데 어제 높은 길에서 고생했고 오늘은 걸어야 할 거리도 기니까 망설임 없이 갈림길에서 낮은 길을 선택했다.
낮은 길에는 인버모리스턴에서 드럼나드로킷을 수없이 오가며 일한 세탁부가 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만들었다는 '세탁부의 피난처'라는 돌로 지은 움막이 있고, 높은 길은 나무로 만든 둥근 조형물이 높은 길의 상징이며 구간 중간쯤에서 높은 길과 낮은 길이 다시 만나게 된다고 했다. 낮은 길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이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높은 길보다는 괜찮겠지! 하고 계속 걷던 중...
산길 중간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지도와 핸드폰을 보면서 뭔가 얘기하고 있었다. 인사하고 지나가려는데 사람들 중 한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했다.
“우리 지금 높은 길이야.“
"눼?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낮은 길 표지판 따라서 왔는데!?"
"우리도 그랬어. 근데 이거 봐라." 아저씨는 아웃도어 어쩌고라는 GPS 어플을 보여 주었다. 나도 그제서야 구글맵을 확인했다. 진짜로 낮은 길은 저~만치 아래에 있고 나의 위치는 그거보다 한참 위쪽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높은 길과 낮은 길이 중간에 한번 만났다가 갈라지는데, 거기서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아."
"난 어차피 높은 길 와보고 싶었는데 잘됐당." 하고 아줌마가 말했다. 시드니에서 왔다는 이 부부는 직장 근처가 코리아타운이라 맨날 한국사람 보는데 여기서도 한국사람 본다며 반갑다고 했다.
탁 트인 고원 같은 황무지가 나타났다. 둔덕진 곳 아래에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다. 젊은 남녀가 이제 길을 떠나기 위해 텐트를 걷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데서 캠핑도 참 잘하네... 저 무거운 캠핑장비를 이고 지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신기한데 이제 이거 이고 지고 22km를 또 걸어갈 것 아닌가. 정말 대단하고 부러운 체력... 난 약간의 먹을 것과 물만 든 배낭을 메고도 당장 숨이 끊어질 것처럼 걸어가는데 쟤네들은 텐트에, 저녁 해 먹을 음식까지 들고 산길을 오른다. 식수는 어디서 구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하이랜드의 물을 깨끗하다. 하지만 등산객들이 화장실이 없어서 중간중간 시냇물이나 풀숲에서 볼일을 보는데 음 괜찮으려나... 물론 지나가다 본 캠핑족들 중에는 갤런짜리 물통도 들고 가는 애도 있었다만.
물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스코틀랜드의 물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잉글랜드에서는 절대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사 마셨다. 물에 석회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 있을 때에는 부엌마다 브리타 정수기처럼 필터형 정수기를 설치해 놓거나 물을 받아서 석회성분을 가라앉혀 쓰는 정수기를 썼다. 수돗물을 직접 마시는 건 당연히 안되고 그 물로 밥도 하지 않았다. 영국 수돗물을 마시면 혈관에 석회가 쌓여서 나중에 발목에 실핏줄이 자글자글하고 발목이 두터운 할머니들처럼 된다고들 했다.
16년 전, 에딘버러에 처음 갔을 때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수돗물을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스코틀랜드는 산 좋고 물 좋은 데라 수돗물 마시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감으면 머리도 아주 부들부들했다. 물이 안 좋아서 양치도 생수 사다가 한다는 괌 사이판 같은 곳에서는 샴푸질 해도 거품도 잘 안 나고 머리를 감아도 금방 뭔가 벅벅거리는 느낌이 나는데 스코틀랜드에 오래 살면 샴푸 광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 이틀째에 묵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스피언브리지의 더 헤더스 B&B 주인장은 아주 자랑스럽게 "가면서 마실 물은 사 먹지 말고 우리 집 수돗물 받아 가라. 우리 집 물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정말 깨끗하고 물이 맛있어."라고 했다. 그러니 등산객들이 시냇물에 실례만 하지 않았다면 어젯밤 이 캠핑한 커플이 마신 물도 매우 좋은 물이었을 것이다.
"간밤엔 비도 안 오고 경치도 좋았는데 텐트 안에 있으면 텐트 바깥에 수만 마리의 깔따구들이 붙어 있는 게 보였어요."하고 캠핑 커플이 말했다.
으아악 끄어어억! 싫어! 오늘도 또 보는 거야? 싫어 싫어ㅜㅜㅜ!!!!
그때, 정말 안타깝게도 자전거를 '끌고' 한 여자가 헐떡거리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 지금 높은 길이죠?"
낮은 길은 사이클링, 승마 등에 적합하고 높은 길은 좁고 경사가 많아 온리 등산객 용이었다. 그 여자도 여기가 낮은 길인 줄 알고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ㅇㅇ맞음 우리도 지금 다 낮은 길인줄 알고 잘못 왔음."
"아아... 난 오늘 인버네스에서 기차 타야 하는데... 글고 인버네스 공항에서 비행기 타야 하는데...(근데 지금 여기 있니... 대단하다ㅜㅜ)."
"아유 운동 많이 되겠다." 시드니 아저씨가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최소한 지역 대표 운동선수임에 틀림없는 그 여자는 자전거를 끌고도 나보다 빨리 앞질러 가버렸다.
트레일 가이드북에서 본, 나무로 만든 둥근 조형물(The Viewcatcher)이 나타났다. 풍경을 둥근 액자처럼 보여주는, 하이랜드의 거친 나무로 만든 이 작품은 걷는 사람들에게 풍경 감상 위치 표시를 제공하는 트레일 아트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설치된 조형물이다. 이게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심 시드니 아저씨가 착각했거나 부칸의 소행(부칸이 공작질하기엔 좀 멀지만)으로 GPS가 위치를 잘못 잡아주는 것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 높은 길 맞다ㅜㅜㅜ 모두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온 기념으로 서로 조형물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어주고 각자의 체력에 따라갈 일을 갔다(물론 내가 제일 마지막).
가파른 산길에 계속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정말 주저앉아 울고 싶고 표지판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스코틀랜드 관광공사 및 그레이트 글렌 웨이 관리하는 놈들을 모두 붙잡아 산속에 매달아 놓고 싶었다. 힘드니까 조금 쉬면서 가도 되었으련만, 이렇게 힘들어도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 앞에 가는 사람들에게서 너무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멈춰 서면 다가올 '그들'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앉아서 쉰다거나 하면 금세 그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될 테니까.
지인짜 가파른 구간에서 신기하게도 시드니 부부와 체코에서 온 캠핑하던 젊은이들, 그리고 나까지 다섯 사람이 모두 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저씨는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저스트 라운더 코너(Just round the corner) 저스트 라운더 코너!" 하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나라 산길에서 정상 찍고 내려오는 사람이 올라가는 사람에게 "다 왔어요 다 왔어!(사실은 1시간 남음)“ 하는 거하고 놀랍도록 똑같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어찌 다 저렇게 말하는지 참으로 신기했다(근데 나도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헤드 갔을 때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는 사람한테 똑같이 대답해 주긴 했다. 이게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아직 다다르기 전의 사람의 마음가짐의 차이인 것 같다).
가장 높은 지점을 넘어, 드디어 네스 호가 바라다보이는 좁은 산길에서 이 험한 길을 넘어 여기까지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저씨는 아줌마 사진을 찍으며 "여보 조금만 옆으로 옆으로~(근데 옆이 벼랑임)" 했다. 나 같으면 저놈이 나를 여기서 제거하나? 하고 화가 버럭 날 만 한테 아줌마는 "ㄴㄴ 보험처리 안됨."하고 대답했다. 그런 걸 보면 이 부부는 보통 서로 디스하는 게 일상 같았다.
높은 길과 낮은 길이 드디어! 만났다! 이제 오르막길은 없다. 날이 개서 푸른 하늘과 그 귀하고 뵙기 힘든 해님이 빛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저 아래 네스 호의 경관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길도 넓어져서 심지어 차도 지나갔다. 원래 차는 통행금지지만 유지보수 차량이나 환자 이송 등 허가받은 차는 다닐 수 있다.
어제 만났던, 승무원 할머니의 딸과 며느리를 만난 것은 이 길고도 긴 숲길을 나와 이제 민가가 있는 동네 길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두 여자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어제 다 같이 "네버네버 하이루트!"하고 외치고는 "내일 낮은 길에서 만나!" 하면서 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높은 길로 잘못 들어와 이 개고생을 하는 중인데 그녀들은 맞는 길로 가서 편히 걸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얘네들도 나처럼 높은 길로 잘못 들어가서 벅벅 기다가 막 내려온 참이었다. 심지어 높은 길에서 내려와 낮은 길과 합류하는 지점에서야 자기들이 높은 길을 타고 온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둥근 나무 조형물은? 그걸 봤으면 높은 길인 줄 알았을 거 아냐."
"ㅋㅋㅋ 우리 개 멍청함. 우린 '이게 여기 왜 있지?'하고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갔어. 설마 여기가 높은 길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가이드북에 사진이 반대로 붙어있었다고 생각했어."
"길이 좀 험하긴 했어도 경치는 좋길래 '이야 낮은 길이 이 정도면 높은 길 경치는 진짜 좋겠다!' 하면서 왔다?"
이들의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인 어제 그 할머니는 오늘은 안 걷고 버스로 드럼나드로킷에 가서 보트 투어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의 선택은 옳았다. 오늘은 정말 죽음의 코스였다ㅜㅜ
마지막 5km는 정말 발이 너무 아파서 거의 절름거리면서 걸었다. 도중에 승마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승마 구간이라는 것은 길에 떨어진 엄청난 똥덩어리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저 말 한 필만...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드럼나드로킷은 인구는 몇 명 안 되지만 네스 호와 우르콰트 성을 끼고 있어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름 상업적인 마을이라 시설도 많고 관광버스도 엄청 다녔다. 점심 먹느라 뒤로 처졌던 시드니 부부를 다시 만났다. 승무원 할머니의 딸과 며느리는 시드니 부부와 같은 숙소에 묵었었기 때문에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너네도 높은 길로 잘못 갔냐?" 하면서 다들 황당해했다.
코스 초입에서 높은 길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낮은 길과 평행하게 이어지다가 두 길이 한번 교차한 후에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문제는 이 두 길이 교차하면서 사거리가 되는데, 자기 코스를 가려면 직진이 아니라 직각으로 꺾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직진하면 높은 길 타려던 사람은 낮은 길 가고, 낮은 길 가려던 사람은 높은 길 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차로에 세워 놓은 표지판이 넘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높은 길 사람들도 직진하고, 낮은 길 사람들도 직진하다가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며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낮은 길로 가려던 사람도 자전거를 끌고 가파른 산길을 넘었으니 부디 그 여자가 제때 인버네스에 도착해서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안 놓치고 탔기만을 바랄 뿐이다.
"잘 갔을 걸. 일단 내려가는 길부터는 엄청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시드니 아줌마가 말했다.
숙소는 중세 판타지에 나오는 여관집처럼 일층이 술집 겸 식당이고 이층이 방이었다. 왠지 여행하는 판타지 캐릭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숙소 이름인 'Fiddler's at Oakdale'는 '참나무 계곡의 피들러(펍에서 켈트나 포크 음악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뜻이다.
이름조차 판타지스러워 꺄악 ˚₊·ଘ(っ≧∀≦)っ˚₊·♡
방에 들어가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내 생전 발을 이렇게 혹사시킨 적이 있었던가. 한국 돌아가면 방콕 같은 데 가서 하루 종일 발마사지만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 뜨뜻하고 칼칼한 육개장 한 사발만 때리면 살아날 것 같은데, 숙소 아래층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은 삼겹살 통구이였다. 적양배추 볶음이랑 매쉬 포테이토 그리고 스코틀랜드 블랙푸딩(돼지 피와 소/돼지의 비계, 귀리를 넣은 순대)이 곁들여 나왔다. 통귀리가 씹혀서 고소하고 맛있었다.
발이 너무 아파서 방바닥을 딛기만 해도 아팠다. 정말 현명하게도 드럼나드로킷에서 1박 추가를 해놨기 때문에, 내일 바로 30km를 걸어서 인버네스로 가야 하는 사람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다들 나처럼 한가하지 않아서 다른 데를 더 여행하러 이동하거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사실, 내 팔자가 상팔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