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글렌 웨이 7일째
Additional day at Drumnadrochit
숙소: 드럼나드로킷, 피들러즈 오크데일
3박이나 하게 되는 이번 숙소는 펍 겸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안마당에 피시 앤 칩스 같은 포장 음식을 파는 푸드 트럭이 있고, 길 건너편과 레스토랑 위층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개인이 사는 집을 개조해서 손님을 받는 전통적인 의미의 B&B나 게스트하우스보다 이런 형태의 숙소가 좋은 점은 관리하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직원'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주인이 친절하게 해 주고 자기네 주거 공간에만 처박혀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남의 집' 안에 지어진 숙소라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아래층이 술집 겸 식당이다 보니 왠지 주막집이나 중세 시대 여관에 묵는 것 같아 괜히 설렜다. 왠지 아래층에 내려가면 음유시인이 하프 타며 노래하거나 바이올린 켜는 악사가 켈트 음악 연주하고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모험담 얘기할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실제로 중세 시대 여관은 판타지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여관과는 매우 다르고 미친 듯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었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판타지가 달리 판타지가 아닌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어제 살아생전 처음으로 22km나 되는 긴 거리를 그것도 산길로! 과하게 걸은 탓에 아직도 발이 원상복구가 되지 않았다. 바로 아래층이 식당인데 밥 먹으러 내려갈 기운도 없었다. 겨우 기어내려 가서 밥 먹고 다시 방에 처박혀 히터를 만빵 틀고 누워만 있었다.
창밖을 보니 그새 날씨가 거지 같이 변해 있었다(늘 그렇지만). 이제 그레이트 글렌 웨이도 모레면 끝나는데 이렇게 귀한 하루를 아무것도 안 하고 널부러져 있자니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이 동네는 스코틀랜드의 그 많은 성들 중에서도 멋지기도 소문난, 스코틀랜드가 나오는 모든 달력과 엽서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우르콰트 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를 안 가보고 드럼나드로킷을 지나갈 수는 없었다.
우르콰트 성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다. 위치가 미쳤기 때문. 네스 호 절벽 바로 위에 자리한 이 성은 호수를 배경으로 한 성의 모습이 미친 듯이 처연하다. 무너진 것도 분위기 죽이게 무너져 있어서 쓸쓸함에 낭만이 쩐다. 원래는 13세기부터 있었던 상당히 중요한 요새였던 이 성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때 주요 거점이기도 했고, 여러 번 공격받고 탈환하기를 반복했다. 성채 자채도 지었다가 증축했다 무너졌다 다시 지었다 불탔다 아주 역사도 복잡스럽다. 그리고 17세기에 적에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폭파되었다.
숙소가 있는 드럼나드로킷 읍내에서 성까지는 편도 약 3.7km. 어제 22km를 걸었더니 이제 한자리 숫자는 걱정도 안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하지만 한국 다시 가면 또 달라질 것이다). 발 아프고 힘없어서 누워만 있다가 오후가 돼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섰다.
지나가다 보이는 풍경을 보니 내가 확실히 동쪽으로 많이 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스카이 섬이나 글렌코, 글렌 네비스 등 서쪽에서 본 풍경들은 산들의 실루엣이 겁나 위압적이고 험하고 무시무시한데, 동쪽으로 향할수록 능선이 낮고 부드러웠다. 드럼나드로킷을 둘러싼 산들도 확실히 서쪽과는 달리 부드러운 능선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픈 발을 끌고 겨우 미적미적 걸어서 도착한 우르콰트 성은 비 내리는 네스 호를 배경으로 폐허처럼 쓸쓸하게 서 있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참으로 스코틀랜드다운 날씨에 스코틀랜드다운 풍경이었다. 이따위 날씨에도 성을 구경하겠다고 관광객은 꽤 많이 와 있었다.
이 유명한 성의 역사에는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절대 이름이 빠지지 않는 성 콜룸바께서 등장하신다. 아일랜드에 성 패트릭이 있다면 스코틀랜드에는 성 콜룸바가 있다.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6세기 인물로,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이다.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핵심 인물로 스코틀랜드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원래 스코틀랜드 북쪽은 켈트 문화, 토착 신앙이 중심이었는데 성 콜룸바가 와서 아이오나(Iona) 섬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을 거점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성 콜룸바는 단순한 성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문화적, 종교적 상징이다.
이 성 콜룸바가 어느 정도로 대단하신 인물인가 하면 무려 네스 호의 괴물(헐!)과도 관련이 있다. 이 얘기는 그냥 구전되는 설화가 아니라 성 콜룸바의 전기를 쓴 수도사 아돔난(Adomnán, 아이오나 수도원의 9번째 수도원장)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원래 스코틀랜드 동쪽은 스코트 족의 동네였다(그래서 스코틀랜드다). 6세기의 어느 날 이 동네에 도착한 성 콜룸바는 임종을 앞둔 클랜 족장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내리고, 그 식솔들을 시작으로 무지한 스코트 인들을 점차 개종시켰다. 그때 마침 네스 호에서 괴물(괴물의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이 나타나 스코트 족의 사람들을 해쳤는데, 성 콜룸바가 괴물을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어떻게 사라지게 했냐면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다가오자 손을 들어 십자가를 긋고 "더 이상 오지 말고 돌아가라!"라고 외쳤다고 한다(괴물이 영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기적을 일으킨 성 콜룸바를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이로써 괴물이 네스 호에 살아온 지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개체 수명이 얼마나 긴지 몰라도 6세기에 나타난 애가 아직도 살고 있을 리는 없으니 깊고 깊은 네스 호수 속에서 대대손손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다.
오늘은 아픈 발을 끌고 왕복 7km를 걸어 우르콰트 성 구경하고 하루가 끝났다. 내일도 19km를 걸어야 하니 더 이상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차피 이 동네에서 우르콰트 성 말고는 볼 것도 없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아래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국밥 한 그릇만 뚝딱 밥 말아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은데, 이놈의 동네 음식들은 다 이런 것들 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배는 채워야지. 먹고 방에 돌아가 히터 빵빵 틀고 몸을 말리며 쉬었다.
이렇게 드럼나드로킷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