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글렌 웨이 8일째
출발지: 드럼나드로킷
도착지: 블랙폴드(Blackfold)
숙소: 드럼나드로킷, 피들러즈 오크데일
걸은 거리: 19km
이 동네에서 비가 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맑은 날이 더 이상한 날이다. 그래도 지겹다. 맨날 비 비 비 비 비...
피로도 아직 안 풀렸고, 빗속을 걷는 건 생각만 해도 짜증 나서 아침 먹고 뭉기적뭉기적 누워 있었다. 그냥 오늘까지 농땡이 치다가 내일 버스 타고 인버네스 확 가버려? 아니면 내일 확 미친 척하고 30km 한꺼번에 걸어버려? 귀찮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실제로 출발한 것은 거의 열두 시가 다 되어서였다. 걸을지 안 걸을지조차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코스의 끝인 블랙폴드에서 나를 픽업해 줄 여행사에 전화하는 것도 열두 시 넘어서였다. 오늘은 드럼나드로킷과 인버네스 사이의 30km 중 첫 19km를 걸어 블랙폴드까지 가야 하는데, 블랙폴드는 숙소는 물론 집도 없는 허허벌판 구간이다. 그래서 블랙폴드에서 여행사 픽업 담당과 시간을 조정해서 드럼나드로킷에 다시 돌아와 같은 숙소에서 한 밤 더 자고, 내일 아침에 여행사에서 블랙폴드까지 다시 차로 데려다주면 거기에서 다시 걷기 시작해서 인버네스로 가는 것이다.
내 현재 몸 상태와 거리를 따져보고 6시면 블랙폴드에 도착할 것 같아서 길을 떠나며 로크 네스 트래블(Loch Ness Travel)에 전화해서 6시에 데리러 와달라고 얘기했다. 사실 길이 어떤지도 모르고 6시간 동안 19km를 걸을 수 있을지 어쩔지도 모르는데 시간약속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침에 먼저 블랙폴드에 떨궈주면 코스를 거꾸로 걸어 드럼나드로킷으로 돌아오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 약속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천천히 내키는 대로 걸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 방법을 몰랐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의 다른 사람들 후기에 의하면 마지막 코스 30km가 가장 지겹다고 했는데, 지겨운 것과 별도로 이놈의 코스는 숲 속 진창길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비 내리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걷는데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오늘 코스는 길 정돈이 제대로 안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진흙탕이었다.
네스 호가 내려다보이는 숲의 경사진 빈터에는 양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풀을 뜯으며 "저기 또 사서 고생하는 븅신들이 오네"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울창한 숲을 걷다가 나와 같은 코스를 걷는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인버모리스턴에서 '자의로' 높은 길을 타고 왔다고 했다. "경치 좋던데?"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길래 높은 길에서 거의 죽었다 살아났다고 생각한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2차 대전 때 캐나다 벌목꾼들이 와서 벌목 작업을 하다 동네 여자들과 하나둘씩 결혼해서 살았다는 사연이 있는 벌목장을 지났다. '전쟁 끝나면 캐나다 갈 준비하는 부인들 모임'까지 있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았는데, 실제로는 캐나다로 안 가고 그냥 스코틀랜드에 눌러 산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벌목장과 히드가 가득 핀 황무지를 지나자, 참말로 이상한 아주 좁은 오솔길을 지나게 되었다. 사실 지도상으로는 이 길을 지나지 않고 동네 도로를 지나가도 될 것 같은데, 자연적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아주 좁은 샛길에 양쪽에 풀숲이 가득 우거져 있어 지나가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날씨라도 좋았으면 예쁜 오솔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바닥마저 진창이라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길 양쪽에 마치 유혹하듯이 '커피?' '차?' '코코아?' '토스트?' 하고 춥고 지친 여행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나무 표지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 가이드북에서 본 적이 있는 표지판들이었다. 걸을수록 표지판들은 점점 더 설레는 문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 이제 곧', '스크램블드 에그 이제 조금만 더'. 그러나 아무리 가도 그놈의 뜨거운 차와 커피를 파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표지판들이었다.
사실 뭔가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걸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힘들고 그런 걸 다 떠나 화장실이었다. 중간에 카페나 식당 같은 것도 거의 없고(있다 해도 출발지나 목적지 가까이에나 있지 중간은 그냥 다 산 아니면 벌판이다) 간이 화장실도 한두 개 있긴 했는데 더러웠다. 다행히도 전생에 모래쥐였던 나는 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20km쯤 걷다 보면 화장실에 안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할 때쯤에는 대부분 상당히 위급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자연 친화적인 이 코스에 관광객을 위해 굳이 인공적인 화장실이나 시설물을 안 짓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였으면 바로 코스 전체를 시멘트로 깔고 중간에 화장실 짓고 그랬을 텐데 그러면 자연 속을 걷는 느낌은 덜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인즉슨 화장실도 자연 속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풀숲에서 쉬야를 하는 일이 뭐 어려운 일이겠냐만은 걷다가 사람들과 마주쳤던 일들을 생각하면 일을 보다가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반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중간에 자연 속에서 용무를 해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 날은, 특히 이 사람 환장하게 하는 표지판들을 보았을 때쯤에는 꽤나 긴급한 상태였고, 비를 맞아 춥고 축축해서 어딘가에 들어가 몸을 말리고 싶었다.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화장실도 가고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진흙탕 같은 길을 경보 수준의 무서운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코코아와 커피 화살표를 따라가기 위해 코스를 벗어났다. 진창에 빠지지 말라고 대패조각과 나뭇가지들을 깔아놓은 진입로는 이틀 동안 내린 비로 나뭇조각과 진흙이 뒤섞여 나무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길의 어느 한 군데도 진창이 아닌 데가 없었다. 등산화는 방수여도 길이 워낙 진창이라 바짓단까지 진흙투성이였지만 어차피 숙소 들어가면 빨 거니까 포기하고 걷고 있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카페인지 뭔지가 나오지 않자 나중에는 진짜 입으로 "아우 씨벌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면서 오기로 끝까지 걸었다. 완만한 경사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 양 옆에는 점점 더 많은 '조금만 더 커피커피' 표지판들이 나타났다. 알았으니까 카페 어딨냐고 이 새퀴들아! 날라차기를 해서 표지판들을 다 부러뜨리고 싶었다.
갑자기 눈앞에 빈터가 나타났다. 논바닥처럼 푹푹 빠지는 빈터 옆에는 설마 사람이 살 리는 없고 가축이나 키울 것 같은 남루한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설마 이게 카페? 그런데 저편에 '아직이다 조금만 더 와' 같은 표지판들이 서 있었다. 한국말로 욕을 하며 끝까지 나아갔다.
집(?)이 나타났다. 철창 너머 송아지만 한 큰 개 두 마리가 나를 보고 컹컹 짖었다. 이 집은 이 개들을 초인종으로 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모내기할 때나 신을 것 같은 고무장화를 신고 손에는 쟁반을 든 여주인이 나타났다. 나는 여주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카페... 카페 어딨어요?"
"여기임ㅇㅇ 여기서 주문하면 아까 너 지나온 오두막으로 내가 갖다줌."
오두막? 아까 그 가축 치는 사육장 같은 건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사람용 건물이었다는 것도 충격인데 그게 '카페'라니 충격으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일단 이거 좀 갖다주고 니 것도 만들어줄게. 뭐 마실려?"
"핫초코... 근데 화장실! 화장실은 어디죠?"
"일루 오셈." 여주인은 장화를 신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쟁반을 들고 앞장섰다.
아까 지나온 '오두막' 한켠에 테이블과 의자 비슷한 것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남녀 커플 하나가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서 매우 기뻤다. 빈터 위에는 예닐곱 마리의 닭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돼지들도 그냥 막 돌아다니게 냅두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 돼지는 없었다.
이곳은 '에코 캠프', 즉 친환경을 추구하는 캠프장이었다. 나는 캠핑을 안 해서 잘 모르지만 집이 아닌 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필수적인 것들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물, 열, 조명, 그리고 하수 시설. 이것을 친환경을 추구하는 곳에서 해결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오면서 봤던 사람 환장하게 하는 표지판들도 인공적인 나무판이 아니라 진짜 나무를 평평하게 세로로 쪼개서 그 위에 글씨를 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에코 캠프에서 화장실은 대체 어떻게 지어놨을까?
일단 화장실 얘기이므로 혹시 뭐 드시면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미리 죄송한 말씀 드린다. 괜찮다면 계속 읽어 주시기 바란다.
여주인이 안내한 화장실은 태평양에서 발생하여 괌 사이판 대만 오키나와를 모두 지난 다음 기운 다 빠져서 우리나라 서해안에 도착한 가장 약한 태풍만 불어도 무너질 것 같은 조그만 움막 같은 곳이었다. 벽돌로 쌓아 올린 벽 위에 가냘프게 얹힌 슬레이트 판이 지붕이었다. 문이 달려 있었지만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닫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올 사람도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체 변기가 어디 있지? 이게 화장실이 맞나? 하고 보니 벽돌을 높이 쌓아 올린 위에 양변기 패드와 뚜껑이 올려져 있었다. 마치 왕좌와도 같은(...) 존재감이었다. 벽돌 계단을 올라가서 그 위에 앉아 일을 보는 것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신기하게도 냄새는 안 났다. 무너질 듯 부실한 움막에 지어 놓은 화장실 치고는 나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일을 다 보고 나서 여주인이 설명해 준 대로 양철 바께스(...)에 들어있는 톱밥을 바가지로 퍼서 변기 안에 뿌리면 다음 사람이 와도 쾌적하게 관리되는 것이었다. 수도는 없었다. 손을 씻을 물 대신 손 세정젤(...)이 있었다. 나야 살균 티슈를 가지고 다니는 현대인이지만 큰일 본 사람들은 이것만 갖고 안될 텐데...
급한 일을 해결하고 아까 그 오두막으로 가서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친절한 여주인이 가져다주는 핫초코를 마셨다. 편안한 의자는 아니었지만, 치적치적 내리는 비로 논두렁처럼 물이 가득 고인 빈터 위에 닭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바라보며 마시는, 큰 컵 가득히 담아 마시멜로를 얹은 따뜻한 핫초코는 정말로 맛있었다.
카페(...)를 나와 6시까지 블랙폴드에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가던 길을 갔다. 저만치 앞에 사슴 한 마리가 껑충껑충 뛰어 길을 가로질러 갔다. 결국 6시 10분에 나를 찾는 듯 도로 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차를 발견했다. 이 동네에 모르는 것이 없는 조지 심슨 할아버지였다.
"걷기 어땠니?"
"진흙탕 때문에 힘들었지만 괜찮았어요."
"카페도 갔느냐?(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인 것처럼 물어봤다)."
"넹 갔어요. 여주인 짱 친절함."
"ㅇㅇ 거기서 커피 한 잔 마시면 아주 좋지. 투어는 어느 여행사로 했니?"
"콘투어 여행사요."
"아 콘투어? 시모나한테 했냐?"
"헐 어캐 아셈(나 예약해 준 사람 이름이 시모나였다)."
"내가 여기서 몇 년째 일하는데 모든 사람 다 알지. 거기는 재작년까지 로컬 여행사에 숙소 예약만 따로 맡기다가 이제는 숙소까지 자기네들이 다 하고 있어. 여튼 난 내일 너랑 니 가방 싣고 너는 중간에 떨궈준 다음에 인버네스까지 가서 니 가방 전해줄 거임."
돌아가는 길에 사슴 두 마리를 또 보았다. "봐라, 뿔이 없지? 아직 젊은 사슴이야." 하고 이 동네 모르는 게 없는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내일은 힘든 구간 하나도 없고 평탄하니까 오늘은 실컷 놀아도 돼."
숙소에 도착했다. 동물원 이외의 장소에서 야생 사슴을 본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내일은 드디어 그레이트 글렌 웨이의 마지막 코스를 걷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