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때 일기장 발굴기: 나는 지금도 그러고 산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by 마봉 드 포레

계속되는 중딩의 일기.

길게 쓰는 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고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가끔가다 길게 쏟아져 나오는 누군가에 대한 욕 말고는 모든 것이 매우 짧다.

자 매우 쓸데없는 스토리지만 19**년대 여중딩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 19**년 3월 10일 >

교실 청소를 하다가 198*년의 학급일기(작년 선배들 학급일기)를 발견했다. 담임 선생님이 반 애들하고 싸우고(?) 며칠 동안 교실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애들이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 - 빨리 화를 푸시고 저희 반으로 오세요" 하고 디게 불쌍하게 써 있었다. 주번이 쓴 것 같은데 며칠 동안이나 그 말이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안 들어온 모양이다.

에이구...선생님이 돼 갖고 왜 애들하고 싸우고 그러지? 근데 누굴까...


< 19**년 3월 12일 >

라디오에 내가 보낸 사연이 소개됐다! 와! 근데 내가 신청한 노래는 안 틀어주고 사연만 소개해줬다.

(무슨 라디오 프로그램인지, 무슨 사연이었는지는 안 적어놔서 뭔지 모르겠다. 진짜 죽어도 기억안남)


< 19**년 3월 14일 >

우리반 ㅇㅇ이가 옆반 교실에 놀러갔다가 종례시간이 됐는데 빠져나오지를 못해서 그대로 앉아서 종례까지 받고 왔다. 그걸 또 자랑이라고 얘기하고 앉았다.


< 19**년 3월 15일 >

선생님이 반 애들 손바닥을 다 때려서 자가 부러졌다.

(당시에는 이 정도는 체벌 축에도 못 꼈다. 80-90년대에 학교 다닌 사람은 잘 알 것이다)


< 19**년 3월 16일 >

국사선생님이 열받아서 우리반 다 패고 갔다. ㅇㅇ이가 몽둥이를 불태워 버리자고 했다.

근데 그거 태워도 또 있을 것 같다.


< 19**년 4월 10일 >

국어선생님이 북한에 할아버지 땅이 있다고 자랑했다.

통일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럼 나도 달나라에 땅 있다.

(그때부터 성격 이랬구나... 나...)


< 19**년 9월 26일 >

(빼먹고 여기 올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귀찮아서 안 쓰다가 9월에 다시 쓴 것임)

나는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와 진짜 거울을 보니까 진짜 눈뜨고 못 봐주겠다.

엄마한테 항의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못생겼으니까 인생 대강 살아야겠다.

(이것만은 지금까지도 성실하게 지키고 있다)


일기를 열심히 쓰는 편은 아니어서 남은 게 별로 없었고 이것만 발췌해 놓은 다음에 원본은 버렸다.

혹자는 왜 버렸냐 아깝지 않느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킵하기에는 너무 내용이 없었다.


지금도 일기는 쓰지 않는다. 그냥 매년 커피집에 갖다 바치는 돈 대신 하나씩 주는 다이어리에 나중에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장소 이름이나 사건/이벤트 이름을 적어놓는다.


중고딩 때 그때 성적이나 시험 얘기 말고 다른걸 좀 적었더라면 그나마 볼게 좀 있었을 텐데...

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일관성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절대 적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적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은 꾸준해야 하니까.


다른 얘긴데, 나는 2004년부터 대략 한 2011년까지 블로그(이글루스)에 글을 열심히 올렸다.

지금 '감성 없는 감상문' 등에 올려놓은 글들은 이때 쓴 글의 백업본을 고쳐 쓴 것이다.

나중에 보니까 2004년부터 2011년까지의 일기는 그 블로그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페북, 인스타 등이 생겨서 거기에 적은 것이 곧 일기가 되었다.


학생 때는 학교 욕, 살찐 거 걱정, 시험 걱정만 하던 그 인간, 직장 다니기 시작하니 직장 욕, 살찐 거 걱정, 카드값 걱정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 사는 거 나이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거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일기는 반드시 일기장에 쓸 필요는 없다. 자기가 편하게 적을 수 있는 곳이 곧 일기장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종이 일기장이라면 보관을 잘해야 하며...

디지털 일기장(블로그, 페북, 인스타, X...)은 데이터 백업이 되어야 한다.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할 때 그나마 백업은 확실하게 해 줘서 그때 내가 어쩌고 살았는지는 지금 읽어도 생생하다.

그러나 주로 서식하는 서비스가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바람에

(블로그 --> 페북 --> 인스타 --> 이젠 어디? 지금은 인스타도 잘 안 올림)

이걸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건 뭐 알아서 잘들 해야 한다(?).


아무튼, 일기를 안 쓴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기록은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은 단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웹사이트 비번이나 경조사비 먹튀한 인간들 명단들 뿐만이 아니라 소소한 것도 꽤 유용한 것 같으니 나같이 게으른 분이 아니라면 기록 잘 하시라고 조언 드리고 싶다.

난 이렇게 안 생겼다. 얘는 이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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