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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2)

남의 글이 부러워 보일 때, 울프와 오스틴에게 조언을 구한다

by 마봉 드 포레

나는 어디로 가야 하오

챗순이가 빠뜨린 것 같긴 한데 브런치에서 내가 놀랍게 본 글은 오히려 과학 이론, 역사, 기술, IT 관련 글들이다. 지금 당장 출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정보가 많고 오랫동안 공들여 조사하고 쓴 티가 팍팍 나며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삽화, 도표까지 들어가 있다. 이런 글은 나는 죽어도 못 쓴다. 왜냐면 이 정도로 전문적으로 아는 게 딱히 없다. 내가 그동안 직장이라도 다니면서 쌓은 전문 분야라고는 항공사 시스템 정도인데 이건 지상직 취업 학원생들 정도나 좀 관심 있을까, 수요 자체가 없는 부문이다.


브런치에는 소설도 없는 것 같지만 은근히 있다. 일반 소설, 자전적 소설, 동화, 심지어 SF도 있다. 무슨 좋은 걸 먹고 글들을 쓰는지 퀄리티가 이미 드라마고 영화다. 나는 브런치에 소설 비슷한 것이 눈에 띄면 일단 가서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내 글은 여기서는 왠지 ‘넌 진지하지 않아!’ 라며 인정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왕 가벼우려면 차라리 후킹이라도 빡 들어가서 사람들이 이런 미친…! 하면서 바로 다음 화를 클릭해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하지. 결국은 웹소 플랫폼에서는 느린 빌드업, 후킹 없음, 감정선 쓸데없이 깊음, 악녀도 고구마도 사이다도 없어, 빙의 환생 이세계물도 아니라 못 들어가고, 브런치에서는 가벼운 개그라 이질감 느껴져서 외면받고, 아아 난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남의 글이 부러울 때

남의 글들을 부러워하며 읽고 있으면, 마치 나도 그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즉, 남의 글이 멋있어 보이고 내 글 쭈구리 같아 보일 때) 내가 떠올리거나/읽으며 마음을 다잡는 책이 있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이다.


물론 나도 글 쓰는 내 방은 있다. 침실과 분리되어 글만 쓰는 나의 서재 비슷한 방이 있다. 침실과 분리한 이유는 간단하다. 침대를 보면 자꾸 누우려고 해서. 아무튼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를 아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작품인데, 이 책 안 읽어본 사람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요약글이나 분석글에서 울프가 말한 ‘글을 쓰기 위한 조건: 자기만의 방과 연 500파운드(2025년 기준 한화 약 6천만 원)’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즉 글쓰기를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과, 생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글 쓰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 책 얘기를 하는 이유는 방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문장이었습니다. 샤로트 브론테는 산문에 대한 온갖 눈부신 재능을 갖고서도 그 서투른 무기를 손에 쥐고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졌지요. 조지 엘리어트는 그 무기를 가지고 거지 묘사에서 잔학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그 문장을 보고 비웃어 버리고는 자신이 이용하기에 적당한,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모양 좋은 문장을 고안해 내었고 그것에서 결코 떠나본 적이 없지요. 그리하여 샤로트 브론테보다 못한 글재주를 가지고도 그녀는 무한히 더 많은 것을 표현해 내었습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 솔출판사

내가 이 문장을 항상 깊이 새기는 것은, 당시에 가볍고 부드럽기만 한 글이라고 여겨져 무겁고, 엄숙하고, 진지하고, 서두부터 무게 뽝 잡고 들어가는 남성의 글에 비해 폄하당하던 여성의 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잃지 않고 글을 쓴 작가들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문장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비틀거린 샬럿 브론테(제인 에어)와 대조되는, 남의 무거운 문장을 비웃어 버리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 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 사후 2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스틴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기 작가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가 영국 시골 젠트리 계급의 신사와 숙녀들이 대화하고, 춤추고, 식사하다 결국 결혼으로 귀결되는 좁은 세계만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제인 오스틴에게 '왜 식민지 문제나 영국 하류층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느냐', '왜 극적인 상황이 하나도 없느냐' 라고 비난하지 않는다(하지만 샬럿 브론테는 오스틴 작품이 지루해 죽겠다고 깠다).


오스틴은 자기가 알고 있는 좁은 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글을 썼다. 동시대의 남자 작가들이 무려 월터 스콧(아이반호), 괴테(설명 불요), 바이런 같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은 그들처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울프가 얘기하는 것도 이와 같다. 자신만의 글 스타일과 문체, 문장을 지키는 것, 즉 ‘남의 글에 영향받아 자신과 맞지 않는 글을 쓰다가 자기 글도 자기답지 않게 되는’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 울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런 칭송을 보면 마치 제인 오스틴이 생전에 매우 의연하게 작품활동을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제인 오스틴은 소설, 특히 여성의 소설이 한없이 가볍게 취급받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다. 이게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노생거 사원 Northanger Abbey’. 여기에서 오스틴은 자신의 온 작품 통틀어 단 한 번 찐하게 ‘작가의 개입 Authorial intrusion’를 넣어버리는 짓을 하고 만다(‘엠마’, ‘설득’, ‘오만과 편견’ 등에서도 작가의 개입이 조금 있긴 한데 거의 서술에 묻어가는 분위기라 작가가 대놓고 방백하는 거라고 보기엔 어렵다).

한가하게 공상이나 늘어놓는다는 비난은 평론가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중략) 우리가 생산하는 작품은 세상의 어떤 문예 활동보다 더 폭넓고 진솔한 기쁨을 제공해 주지만,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이렇게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중략) 한마디로 가장 위대한 정신력을 드러내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그 다양성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 그리고 재치와 유머의 가장 생생한 발산을 최고의 엄선된 언어로 세상에 전달하는 책들인 것이다.

『노생거 사원』, 제인 오스틴 지음, 최인자 옮김, 시공사


오늘날에 와서 소설 읽는다고 무시당할 사람은 없겠지만, 같은 선상에 ‘가벼운 문체/소설’을 대입해 본다면 비슷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즉, 가벼운 문체의 글이라고 해서 오스틴이 말한 것처럼 ‘위대한 정신력을 드러내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그 다양성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 그리고 재치와 유머의 가장 생생한 발산을 최고의 엄선된 언어로 세상에 전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 결론이 뭐죠? 장황하게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까지 끄집어내서, 영문과 과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님 지금 뭐하셈?


아, 긁적긁적, 그러니까,

염소 나오는 글이라고 해서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아니 그럼 댁은 염소 황태자가 나와서 중 2병 대사 치는 얘기에 뭔가 철학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까?


철학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전달하고자 하는 뭔가가 있다, 라는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슈가버터, 여기도 망한 것 같다. 튀자.

김탱고(김경훈) 작가님의 오마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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