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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보 mabo Mar 25. 2022

7일간의 걷기 예찬

감각으로 발 내딛기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이 생기면 
걸으면서 해결 방법을 생각해왔고, 그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걷을 때마다 특정 감각에 집중해서 걸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틴어에 솔비투르 암불란도 solvitur ambulando라는 매력적인 표현이 있다. ‘걸으면서 해결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 이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밖으로 나가 한 발씩 내딛다 보면 마음이 풀어지고, 혈액 순환이 좋아지며, 자연과 의미 있는 연결을 체험한다. 푸르고 따뜻한 봄에도, 낙엽이 쌓이고 해가 짧아지는 추운 계절에도 걷기는 계절과 상관없이 이점이 많다. 규칙적으로 걷다 보면 길이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위로한다. 산책하며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하나하나 세부적인 변화를 찾다 보면 1년 내내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최근 행동반경이 좁아지면서 집 근처 산책길과 친해지기로 결심했다. 나는 7일 동안 특정 감각이나 주제에 초점을 맞추며 매일 같은 길을 걷기로 했다. 세계 지도로 보면 작은 점에 불과한 동네를 온전히 느껴보겠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7일간의 걷기 기록이다.


첫째 날

시각

의식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결정을 하자 정말 많은 것에 눈길이 간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길에 조각난 무늬를 연출하고 담쟁이덩굴 잎이 거미줄 같은 줄기에 수를 놓는다. 호손베리는 사탕처럼 빨갛다. 나무 위에 걸터앉은 새까만 눈의 울새는 언뜻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부리를 꼼지락거리며 가슴을 떤다. 이 모든 일이 산책을 나선 후 열 걸음 안에 일어난다. 눈을 크게 뜨고 걸으면 속도도 자연스럽게 늦춰진다. 하늘은 느릿느릿 흘러가는 길고 하얀 구름으로 가득하다. 작은 강에 이르자 물결이 일렁이며 춤을 추고 곳곳에 소용돌이가 치며 끊임없이 모양이 바뀐다. 강둑에 서 있는 회색 버드나무의 낡은 가지들이 갈라지고 비틀린 모습으로 나를 오래 붙잡는다. 나무 기둥은 작품이다. 숲 속에서 너무나 여유롭게 움직인 나머지 한 쌍의 노루를 아주 가까이서, 그들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첫날의 산책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래 걸렸다. 그리고 아주 즐거웠다. 


둘째 날

청각

오늘은 듣는 날이다. 처음 인지한 것은 내 발자국 소리다. 밤새 비가 내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시계의 똑딱 소리도 시간이 지나면 배경이 되어 사라지듯 발소리의 리듬도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분주하게 지저귀는 새소리, 멀리 떨어진 밀 제분소에서 들려오는 기계 소리, 찰랑거리는 강물 소리…. 전나무 밑을 지날 때, 내 인기척에 놀란 새들이 갑자기 날갯짓을 시작한다. 그런데 들리기만 할 뿐 볼 수는 없다.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 모든 소리가 증폭된다. 물줄기는 강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통나무를 지나면서 큰 소리를 내고, 쇠창살로 된 울타리 문을 닫자 금속 걸쇠에서 귀가 멀 정도의 큰 소리가 난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명료하게 들린다. 오래 서서 들을수록 더 많은 소리를 분간해 낼 수 있다. 조용한 하루가 갑자기 프리스타일 오케스트라 연주로 변한다. 


셋째 날

후각

냄새에 초점을 맞추며 걷기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다. 생명이 만발하는 봄이나 여름이었다면 발길을 내딛는 곳마다 주의를 기울일 만한 향기가 계속 나겠지만, 영국의 가을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흥미로운 산책길이 펼쳐진다. 차갑고 흙냄새가 나는,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이 향은 숨어 있던 기억을 불러낸다. 무릎에 진흙을 묻히고 학교 운동장에 서 있던 소년 시절이 떠오른다. 찰나처럼 지나가는 향이 그렇듯, 그 기억도 잠깐 찾아왔다 금세 사라진다. 마른 낙엽은 토탄土炭 같은 향을 내뿜는다. 전나무는 희미한 소나무 향이다.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치 다른 계절의 바람이 불어오듯 생명력 넘치는 녹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숲 속에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자 처음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 같다가, 버섯 향이 나더니, 어디선가 나무를 태우는 냄새가 미세하게 풍긴다. 마치 혼자만의 비밀을 발견한 것 같다.


넷째 날 

촉각

이번 산책도 놀라운 경험이다. 다른 때라면 간과했을 생소한 감각이 주의를 집중하게 만든다. 긴 풀이 내 다리를 스치는 느낌, 주름진 참나무의 거친 질감,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코트를 적시는 이슬방울, 걸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발밑의 시골길 감촉. 무엇보다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이 매 순간 변한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강렬하다. 어느 한순간도 똑같지 않다. 나무로 된 표지판 앞에 멈춰서 녹색 이끼의 광택을 손으로 쓸어본다. 당구대에 깔아놓은 녹색 모직 천만큼이나 부드럽다. 촉감에 집중하다 보니 손 가까이에 잡히는 모든 것을 만지게 된다. 바람과 비를 제외하곤 내가 의식하는 한 모든 것이 내 팔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던 길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다섯째 날

여명

길을 나설 때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한두 단계 밝은 상태였다. 아침은 다소 쌀쌀하고 간헐적으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나뭇가지 너머에서 들려온다. 보통은 산책 시간이 아닌 새벽에 이 길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7일간의 산책 중 이날 산책이 가장 보람 있었다. 대기는 상쾌함과 서늘함 그리고 고요함이 공존한다. 들판은 낮은 안개로 자욱하다. 이른 시간부터 세 칸짜리 열차가 저 멀리서 환한 불빛을 반짝이며 철커덕거린다. 하늘에서 외롭게 빛나는 별 하나가 한 시간 사이 보라색에서 아주 연한 노란색으로 바뀐다. 해가 반쯤 떠 시야가 흐릿해지자, 숲이 아마존처럼 우거져 보인다. 숲에 다가가자 토끼, 딱따구리, 다람쥐 같은 생명체가 내 주변에 몰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이번 산책도 아주 오래 걸렸다. 


여섯째 날

해질녘

전날의 산책이 세상이 눈을 뜨는 시간을 지켜보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반대로 하루의 문을 닫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다. 산책길에 막 들어섰을 때는 햇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20분가량 걷자 금세 어두워지며 길이 형체를 잃어간다. 달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이어서인지 예민해진 신경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산울타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감각은 완전히 깨어있다. 놀랍게도 숲 속에 들어가 가만히 서 있으니 비로소 예민함이 사라진다. 잠시 멈춰서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이성적으로 만든다. 어두운 숲 속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현재에 집중하다 보니 밤 산책이 두려움이 아닌 새롭고 매혹적인 경험으로 바뀐다. 이런 느낌은 축축한 진흙 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와 동반했고, 나의 시력도 갈수록 어둠에 적응되었다. 


일곱째 날

이 길은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가?

같은 길을 연속으로 걸은 지 7일째, 이번에는 이 길이 어떻게 다른 느낌을 주는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약간 웃길 수도 있지만, 내가 이 길의 주인이 된 것 같다. 모든 나무가 내 나무이고, 모든 새가 나의 새이며, 풀밭이 나의 풀밭인 것처럼 다가온다. 조금 더 지나니 그런 생각은 내가 산책길과 연결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산책길에 눈, 코, 귀를 맞추는 일이 더욱더 자연스럽다. 일곱 번째 산책은 앞선 산책의 반복이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는 또 다른 기회라는 것도 깨닫는다. 앞서 했던 여섯 번의 산책에서 늦은 오후의 햇빛이나 발밑에서 서리가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똑같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야생 자두와 발가벗은 나뭇가지의 작은 봉우리가 보인다.

이날의 절정은 집 앞 2분 거리에서 생울타리를 이리저리 오가는 올빼미의 희미한 모습을 발견했던 순간이다. 1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올빼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야 내 눈이 더 열려서 보게 된 것일까.  


일러스트: 존 하머 John Harmer


감각으로 발 내딛기 

날씨나 주변 환경이 산책에 이상적이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에 집중하다 보면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순간 가장 좋은 게 뭐지?’라는 질문으로, 전체적인 풍경부터 미묘한 차이까지 온갖 종류의 다양한 존재를 인지한다. 더 오래 멈춰 서 있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산책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그리고 돈이 들지 않는) 생각정리 방법이다. 마음과 정신이 마음대로 떠돌도록 허락해도 좋다. 하지만 현재 이 순간에 (그리고 시각, 청각, 후각에) 주의를 집중하면 값진 보상이 따라온다. 

익숙한 길을 낯선 시간에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빛, 야생 생물, 길의 전반적 분위기가 사뭇 새롭게 느껴진다.

산책길에 있는 나무와 새의 이름과 특성을 공부하면 자연과 더 긴밀히 연결된다. 휴대폰 없이 산책하는 것의 장점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반대로 절제하면서 잘 활용해 보자. 새의 울음소리로 새를 식별하는 앱을 설치하면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새의 이름을 알 수도 있다. 

강이 흘러가는 모습이나, 새와 곤충의 행동에 주의를 집중하면 산책하는 동안 명상을 체험할 수 있다. 

매번 산책길을 새로운 모험으로 생각한다. 오늘 바람은 어떤가? 하늘은? 구름은? 발밑의 땅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계절이 변화가 드러나는 곳은 어디인가?


<브리드> 12호 중에서 자유 기고가 벤 러윌 Ben Lerwill가 쓴 "7일간의 걷기 예찬"을 축약한 기사입니다. 마인드풀니스 매거진 <브리드>와 마보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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