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이라도 태양처럼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6시에 집에서 나오면 이제는 새벽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그리고 주말 간간이 내린 비로 인해 낙엽들이 떨어진 길가는 마치 푹신한 캐시미어 이불을 깔아 놓은 듯한 촉감으로 발바닥 아래에서 전해져 온다. 그러나 그 촉감을 더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은 뺨을 강하게 때리는 강한 바람과 함께 드디어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의 날씨였다.
지난주 직원들과 송별회를 한 후 출근하는 길이라 그런지 더욱 낯선 느낌이 든다. 사무실에 도착을 하면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무실이 도심지와 떨어진 약간 외진 곳에 있어서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다.
사무실 내 자리에 앉으면 맞은편 창가의 흐린 유리창을 통해 해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하기보다는 환하게 비치는 유리창만 보았는데 오늘은 왜 인지 떠오르는 해를 직접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약간 붉은빛을 내더니 금세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해를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내며 떠올랐다. 그리고 그 뜨거운 햇빛이 내 뺨과 옷깃 사이로 스며들며 움츠려 들었던 내 몸속의 열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저 태양처럼 뜨겁고 눈부신 인생을 살아왔던가? 51년을 살면서 나에게 뜨거웠던 그리고 눈이 부셨던 때는 언제였나? 눈부신 태양빛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고 이제는 점차 뜨거워지는 몸의 온도를 체감하며 우두커니 서서 지난 추억들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 있으면 직원들이 출근을 하기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낼 수는 없었지만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에 비하면 큰 변화된 인생이라는 혼자만의 의미를 두는 짧은 시간이었다.
오후에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섬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고 하는데 기사가 방문을 해서 수리를 완료했으며 추가로 수리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수리기사와 전화 통화를 하고 협의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다시 통화를 하는데 오늘 수리비가 17만 원이 나왔다고 하시면서 들어와서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섬이라서 그렇다며 너무 비싸다고 나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신다.
보일러를 교체한 지 10년이 넘었고 어차피 평생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니 고장 나면 고쳐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도서지역이라는 환경은 대한민국 어디 업체에서 불러도 일반 비용보다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투정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 문제(특히 돈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번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어도 봤지만 협의점을 찾기가 힘들다. 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아버지의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 너무 싫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아버지가 없는데도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셨다. 이제는 좀 돈에 대해 벗어나라고 말씀을 드려도 잘 안되시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이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일종의 가스라이팅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46년을 함께 살면서 받은 고통과 주입된 사고방식을 불과 몇 년의 세월에 어찌 씻을 수 있을까? 아직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어머니의 그런 말투 속에 투영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내 모습에 오늘도 전화를 끊고 후회를 했다. 아직 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줄어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요즘 읽은 책 들에서 보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나 자신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잊어버리고 용서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많이 보았지만 아직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 감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천륜을 저버리는 나쁜 생각이라고 나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도 인간이니까….
이상하게 묘한 감정이 있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는데 와이프가 외식을 하자고 한다. 흔쾌히 그러자고 동의를 하고 가는 도중 다시 전화가 와서 막내가 이미 밥을 해 놓았다고 집에서 먹자고 하며 들어올 때 막걸리를 사 오라고 한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와이프가 요즘 막걸리 사랑에 빠져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한 잔, 두 잔씩 자주 마시는 것 같아 안된다고 오늘은 그냥 식사만 하자고 말하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식탁에 놓인 막걸리 한 병이 보인다. 안 된다고 했는데 혹시 혼자 나가서 사 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면서 잠깐 했는데 역시 그런 것 같다. 얼른 냉장고를 열어보니 다행히 한 병을 사 온 것 같다.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혼자 나가서 사 오는데 내가 말릴 수 없는 일이고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오히려 이제는 본인이 먹고 싶은 것도 혼자 나가서 의지대로 사 올 수 있는 와이프의 모습이 반가웠던 마음이 생겨서 웃음이 났다.
냉장고 속에 있던 코다리조림을 꺼내 데우고, 있는 반찬을 모조리 꺼내 이른 저녁과 막걸리 한 병에 사이다를 넣어 두 병 같은 한 병을 만든 뒤 저녁을 먹었다. 외식하러 안 가길 잘했다고 하며 맛있게 먹는 와이프의 모습을 보며 나도 흐뭇한 저녁을 먹고 정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