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그 길은 더 멋진 곳을 위한
과정일지 모른다

by 마부자

금주 137일째, 어김없이 피곤은 아침을 찾아왔고, 조금 늦게 잠든 어제의 나태함은 정확하게 오늘 아침의 컨디션으로 반응했다.


밤의 흐트러진 루틴은 다음 날의 무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한다. 알람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깨우는 후츄의 울음소리는 침대에서 거실로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사료 그릇과 물통이 비워진 자리를 채워주며 녀석고의 약속을 지킨다. 짧은 책임감을 다한 뒤 소파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제목: 떠나야 할 때를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잊어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더욱
슬픈 일이다

우리는 잠시 세상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나의 흰구름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너의 흰 구름

누군가 개구쟁이 화가가 있어
우리를 붓으로 말끔히 지운 뒤
엉뚱한 곳에 다시 말끔히 그려넣어 줄 수는
없는 일일까?

떠나야 할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일이다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나를 내가 안다는 것은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어젯밤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편지와 일기를 마무리하고 거실로 나왔을 때, 아내는 TV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 뉴스 외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던 나는 화면 속에서 재생 중이던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2024년 6월에 했던 방송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기대 없이 지나칠 수 있었던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무심결에 소파에 앉았다. 누군지 모르는 인물이었으나 인터뷰의 내용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그날의 출연자는 허준이 교수였다.

(오늘은 그의 이야기로 일기를 대신하려 한다.)


이름도 낯설고 인물도 낯선 그는 한국인 최초로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저 예능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와의 인터뷰는 나를 집중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수학이라는 추상적인 세계 속에서도 결국 인간의 사유와 감정, 태도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걸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TV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철학은 그저 수상 경력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사람의 깊이였다. 나는 그 앞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고요하게 흘러들어오는 순간, 사람은 잠시 멈추게 된다. 어젯밤의 나는 그런 밤을 통과했다.


그는 수학과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계산이나 공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언어로서 수학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고도 단단했다.


방송 속에서 허준이 교수는 자신의 여정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학자로서의 길, 인간으로서의 경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수학이라는 세계.


그는 수학이 단순한 학문을 넘어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이며 그 과정에서 직관과 창의성이라는 인간적인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그의 말 중 유난히 마음에 남은 두 문장이 있었다. 유재석이 물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종신교수직을 제안받고 수락하셨는데, 그 자리를 얻고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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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유 퀴즈 온더 튜브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사실 필즈상 보다 종신교수직 제안이 더 기뻣으며 그 이유는 다음 해에도 계약의 부담없이 수학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울컥했다. 어쩌면 너무도 단순하고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그 속엔 진심이 가득 차 있었다. 종신교수란 결국 정년이 없고 해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주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유를 먼저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오직 수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 말은 어떤 현란한 수식보다 더 명확하게 그의 삶의 태도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 순간, 눈앞에 앉은 그가 인간이라는 형상을 하고 있지만 마음의 크기로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이었다. 삶의 선택마다 흔들림 없는 기준이 있었고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보상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수학이라는 세계를 향한 애정, 그 애정을 실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계속할 수 있음이라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버티고 나아갔다.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 드문 것은 그 명확함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그 희소한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명확한 이유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 삶의 크기를 외형이 아닌 방향으로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 서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결국 어떤 질문이 주어졌든, 그 답을 그렇게 맑고 간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 납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며, 이 시대에 여전히 거인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그는 필즈상을 받고 귀국한 공항 인터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걸어온 길이 구불구불 멀고 험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길이 나에게 최적의 경로였다.” 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도 알지 못한 채 견뎌온 무수한 날들과 그 안에 담긴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어떤 확고한 목표를 품고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욕심 없이,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간 사람이라고 했다. 어려움도 있었고 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고 했다.


만약 그 순간마다 길의 끝을 계산하며 걸으려 했다면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말은 명확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인생은 너무 먼 곳을 보지 말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걸음을 충실히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지금도 각자의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길, 때로는 목적조차 불분명한 길 위에서 흔들리며 걸어간다. 하지만 그 길이 언젠가 ‘나에게 최적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믿음 하나가 오늘을 견디게 한다.


삶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때 비로소 방향을 갖는다. 너무 멀리 보려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 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조용히 붙잡고 걸어가는 태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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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유 퀴즈 온더 튜브


그는 방송의 끝 부분에 말했다. “지금의 시행착오는 어쩌면 시행착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길은 내가 더 멋진 곳을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한 문장이 어젯밤 내 머릿속을,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머물렀다. 어쩌면 내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도, 그 말이 남긴 여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실패라 믿었던 순간들이 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 돌아보면 그것들이 방향을 틀게 했고 결국 나만의 길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중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작 앞에 서 있지만 그 시작이 늦은 게 아니라 꼭 지금이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젯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나의 길을 다시 바라보았다.


실패가 아닌 과정으로 시행착오가 아닌 여정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여정 위에 있는 지금의 나를 조금은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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