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오래된 사진 속 담긴 건 단지 이미지가 아니었다

by 마부자


금주 136일째. 창밖엔 빗방울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굵지 않지만 쉼 없이 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은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 아래 세상은 오히려 차분하게 다가오는 듯 했다.


제목: 말하고 보면 벌써

말하고 보면 벌써
변하고 마는 사람의 마음

말하지 않아도 네가
내 마음 알아 줄 때까지

내 마음이 저 나무
저 흰 구름에 스밀 때까지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밖엔 없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두 사람이 분주한 아침을 끝내고 현관을 나서는 소리가 멀어질 즈음, 집 안엔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그제야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눅눅한 공기를 달래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내렸고, 천천히 식는 향기 속에서 책상 앞에 앉았다.


독서를 특별히 많이 해온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비 내리는 아침이면 책이 조금 더 가까이 느껴진다. 그게 내 감성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신호라면, 나는 그 변화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 마음을 담아 오늘도 조용히 책 한 권을 펼쳤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


생각이 우리를 어떻게 속박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 단지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읽고 나서도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실’처럼 생각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이 때때로 우리를 고립시킨다는 것.


책의 크기는 일반 책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히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깊은 생각이 담겨있는 그 안엔 흔들림 없는 진심이 있었다.


생각을 멈추라고 말하는 책이었지만, 오히려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 속에 잠시 머물렀다.


마지막 책장을 오전에 넘길 수 있었다. 평소 루틴이면 운동 시간이지만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운동을 쉰다. 그리고 책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오후엔 얼마전부터 조금씩 정리하던 아내와의 군시절 연애편지를 정리했다. 책꽂이 한켠에 있던 편지 몇 장을 꺼내기 위해 오래된 파일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두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적힌 날짜는 94년 3월 1일. 그러니까 벌써 31년 전의 사진이었다. 생각보다 낡지 않은 사진에 놀랐고, 언제 어디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3월의 찬바람이 부는 풍경 속에 내가 있었고, 아내와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자전거를 타러 갔던 날이었던 것 같다. 모두가 사복을 입은 한가운데 군복을 입고 사진속에 서 있는 나는 어딘가 낯선 표정이었고, 아내는 힘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그날의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어색하게 웃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 웃음이 맴돌았다.


과거는 희미해지지만, 그 희미함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진을 들고 아내에게 건넸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아내는 어디서 이런 걸 찾아냈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가득 번지는 웃음은 마치 그 시절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들리라고 한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그 정신나간 년, 뭐 그리 좋다고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냐...”


그 말에 나는 사진 속 아내가 아닌, 옆에 앉은 지금의 아내를 바라보며 째려봤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라고 되묻자, 아내는 살짝 당황한 듯 웃더니 “아이 농담이지, 뭘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라고 말한다.


방 안에 있던 막내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막내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는 지금보다 훨씬 귀엽고, 아빠는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네요.”


그 말에 우린 동시에 웃었다. 마치 누군가 정해둔 대사처럼 딱 들어맞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우린 그렇게 사진 한 장 앞에서 31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말투, 그때의 표정, 그때의 거리감마저도 소환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막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근데 엄마, 아빠는 31년 전하고 별로 안 달라진 것 같아요.” 그 말이 사실 아부성 멘트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래도 그런 말을 기꺼이 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웃으며 “정말 그래 보여?”라고 물었고, 막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럼요!”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한마디 더 했다. “아니면… 이미 31년 전에 노안이셨던 건가?”

그 말에 순간 정적이 흐른 후, 아내와 나는 동시에 막내를 향해 외쳤다. “나쁜 놈의 시키같으니라고.”


그렇게 난 아내와 막내에게 연타로 두들겨 맞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나 그 말조차도 웃음 속에 묻혔다.


우리 셋 모두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 한 장 덕분에 웃음이 이어졌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자잘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오갔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연애 이야기, 군대 이야기, 연애시절 실수담 같은 것들. 하지만 그 대화 속엔 오래 함께한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이 있었다.


식탁 위엔 지금 막내의 나이와 비슷했던 나와 아내의 젊은 날의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세대를 뛰어넘어 대화를 나눴고, 그 안에서 서로의 시간을 이해하고 웃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순간, 이제는 그 한가운데에 사진 속 연인과 똑 닮은 아이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내 곁에 존재하는 이들이야말로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진짜 의미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감사함은 종종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밀려온다.

오래된 사진 속에 담긴 건 단지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겪어낸 시간들이었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마음의 어딘가였다.


시간은 흘렀지만 어떤 감정은 그 속에 천천히 스며 남는다.


그렇게 남은 감정은 언젠가 다시 우리를 웃게 하거나 울게 하거나, 조용히 멈추게 만든다. 오늘은 그 감정이 따뜻한 쪽으로 다가왔다. 영원하진 않더라도 오래 남을 감동이었다.


책상에 돌아와 편지를 펼쳐 보았다. 볼펜으로 눌러 쓴 이쁜 글씨들(아내는 어린시절 부터 글씨를 정말 잘쓴다. 반면 나는 완전 악필중의 악필이다.)


어딘가 서툴고 낯간지러운 표현들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 속에는 지금보다 더 솔직한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편지들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당시엔 무척 진지했을 그 말들이, 지금은 풋풋하고 귀엽게만 느껴진다.


그 시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무모했고 훨씬 순수했던 것 같다. 가진 것도 없었고 앞날도 불확실했지만, 마음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던 때. 어쩌면 지금의 나와 아내 보다 더 단단했던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별다른 사건 없이 흘렀지만 책과 편지와 사진, 그리고 함께 웃는 얼굴이 있는 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다.


그래서 오늘은 오래도록 기억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무언가들이 오늘의 우리를 더 다정하게 만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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