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35일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잠시 어깨를 풀고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고 구름 사이로 빛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눅눅한 기운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왠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그 고요함을 바라보다가 명상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제목: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서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아내와 함께. 3개월 마다 가는 단순한 정기진료였지만, 의미 없는 하루는 아니었다. 작년 8월 수술했던 부위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검사 일정을 잡기 위한 날이었다. 검사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조용히 휘저어 놓는다.
아내는 회사를 조퇴했고, 나는 시간을 맞춰 아내의 직장으로 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묘하게 가라앉는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향하는 길, 119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왔다. 횡단보도 앞에서 길을 비켜주며 잠시 멈춰 선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발이 붙은 듯 멈췄다.
작년 2월, 아내가 실려 오던 그날의 장면이 겹쳐졌다. 구급차 침대에 누워 내리는 중년 남성과 보호자의 표정이 그날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외롭다. 북적이는 복도와 소독된 알코올 냄새와 비슷한 묘한 향이 섞인 병원의 공기는 언제나 특유의 무기력함을 동반한다.
진료실 앞에 앉아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그 시간은 유난히 길게 다가온다.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결국엔 불필요한 걱정들로 마음이 바빠진다. 그 기다림의 공기는 무겁고, 시간은 느리고, 의자는 딱딱하다. 그래서 병원은 언제나 마음을 지치고 조금씩 닳게 만드는 것 같다.
담당의와 마주한 건 3개월 만이었고,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8월 초 다시 입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아내는 고개를 숙였다. 검사 결과에 따라 다르지만 입원기간은 짧게는 이틀, 길게는 열흘까지도 될 수 있다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입원 예약을 하고 병원문을 나서는 아내와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특히 아내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좀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흐르고 있었다. 괜히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무거운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약국에 들러 약을 받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내는 아무 말이 없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강변공원에 잠시 들렀다. 비가 그친 강가엔 물안개가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젖은 나무 벤치에 앞에 나란히 서서 한참을 말없이 안개 자욱한 강물을 바라봤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 습기가 가득했고 그 묵직한 습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우리를 내려앉히고 있었다.
아내는 잠시 머뭇이다가 작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왜 또 입원을 해야 하는 건지.” 그 말은 마치 혼잣말처럼 들렸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위로는 얼마나 가벼운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침묵이 오래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있었고,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내의 기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괜찮다고 해도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진료를 받은 것뿐인데도 병원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온몸이 무거웠다. 그 곳에만 다녀와도 하루치 에너지가 고갈된다.
병원이라는 단어는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추게 하는 듯 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어 평소엔 잘 찾지 않는 단 것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스타벅스 상품권이었다. 커피를 살까 했는데 오늘은 정말 단 음식으로 이 우울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초코케이크를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단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오늘만큼은 그 달디단 케익을 제법 많이 먹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우울했던 하루의 기억을 달콤한이란 지우개로 전부 지워버렸다.
달콤한 케이크를 다 먹고 나자 아내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눕겠다고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려고 손을 달력 위에 얹었을 때, 그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마치 봄날 민들레 홀씨가 둥근 몸체에서 툭 떨어져 나가듯 조심스럽고 가늘게 흔들렸다.
나도 처음엔 단지 하루정도의 검사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대 10일 입원’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음은 이미 그날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날짜에 붉은 매직으로 동그랗게 표시를 하며 달력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별다른 일 없이 병원에 다녀온 것뿐인데 몸과 마음이 나란히 지쳐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잘 버텼다고, 우리 둘 다 애썼다고, 그런 마음으로 조용히 하루를 접는다.
달력에 표시된 그 날을 너무 앞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로 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