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나만의 서평을 조금씩
만들어 가는 과정일 테다.

by 마부자


금주 139일째,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살아 움직이는 알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오전 5시 30분 기계적인 알람은 이제 울리지 않는다. 대신 매일 정확한 위치에 앉아서 나를 부르는 낯익은 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심지어 이 알람은 끄려고 하면 내 손의 영역이 살짝 벗어난 곳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가끔은 무섭게 느껴질 정도의 눈빛으로 나를 깨우는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오늘의 하늘은 엷은 청색과 흰 구름이 얇게 겹쳐 있는 형태였다. 바람은 거의 없고, 창밖 나무의 잎사귀는 멈춰 있는 듯 고요하다.


제목: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평소의 월요일보다는 조금 더 조용한 아침이었다. 두 사람, 아내와 막내가 나란히 현관을 나서는 모습엔 말이 없었다.


말없이 나서는 그 발걸음엔 월요일이라는 단어가 무게처럼 얹혀 있는듯 보였다. 출근은 늘 반복되지만 익숙한 풍경인데 왠지 모르게 낯설게 다가왔다.


현관문이 닫히기 전, 나는 문을 다시 열었다. 무언가를 더 건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전, 아주 짧은 틈 사이로 아내와 막내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미소 하나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커피를 내렸다. 손에 익은 컵과 익숙한 자리. 변화 없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잠깐 스쳐간 따뜻한 장면 하나가 하루의 온도를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주말에 손에 들었던 책, 나폴레온 힐의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를 오전 중에 끝까지 읽었다. 자기계발서의 고전이자 교과서라 불리는 책은 그 이름만큼이나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책장을 덮고 나니 왜 수많은 강연자들과 독서가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단지 성공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태도를 묻는 책이었다.


부란 무엇인가, 그 물음으로부터 책은 시작된다. 열망이 첫 단추이고 그 열망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지며 결국엔 두려움을 넘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과정. 그것은 마치 삶의 요약처럼 느껴졌다.


막연히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책이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인간이 삶의 끝자락, 즉 노년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다루고 있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말하는 '부'는 단지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 전체를 향한 태도라는 사실처럼 다가왔다.


오래된 문장들이 오래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이 시간을 이긴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라는 이름보다는 인생의 교과서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리는 책이었다. 단순한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닌,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어떤 문장은 곧바로 마음에 새겨지고 어떤 부분은 한참을 머물게 했다. 그러나 단번에 그 깊이를 다 헤아리기엔 벅찼다.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장들 속에 숨어있는 통찰은 오랜 시간 곁에 두고 되새겨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자주 눈길이 가는 가장 잘 보이는 책장에 이 책을 꽂았다. 그렇게 또 한 권의 '곁에 두어야 할 책'이 내 일상 속 자리를 얻었다.


오전엔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 단순히 느낀 바를 적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글을 쓸 때마다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자각하게 된다.


소설은 그나마 수월하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전제 안에서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만약에”라는 가능성을 자유롭게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픽션이 허락하는 그 자유가 글을 쓰는 나 에게도 어느 정도의 여유를 허락해준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저자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이기 때문에 그 글을 옮기고 해석할 때는 가능하면 원문에 담긴 어조와 감정의 결을 해치지 않으려 애쓴다.


말하자면 에세이를 읽고 쓰는 행위는 저자의 언어를 존중하는 하나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서적은 또 다르다. 사람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저자와 나 사이의 생각의 간극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서 공감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영역처럼 느껴진다. 내용은 단순한 듯하지만 표현 방식과 구조가 제 각각이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저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서로 다른 단어와 비유를 사용한다. 그 차이를 무시하고 글을 쓰다 보면, 자칫 모든 자기계발서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그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더 많은 주의와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서평을 쓰면서도 그런 고민이 유독 깊었다.


결국 시간을 오래 들인 건 또한 그걸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시간을 오래 쓴 데 대한 일종의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주저리’가 또 나만의 서평을 조금씩 만들어 가는 과정일 테다.



책에 대한 서평을 마친 뒤, 오랜만에 운동을 시작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웨이트는 잠시 멈추기로 했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일주일 만의 재개였다.


규칙적인 흐름에서 살짝 비껴났던 몸은 오히려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 가벼움이 리듬을 타며 천천히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는 느낌마저 드는 안정감이 들었다.


운동하는 동안은 어떤 복잡한 생각도 잠시 멈춘다. 화면 속 영상을 바라보며 페달을 밟는 단순한 반복이 오히려 마음을 정리해준다.


땀이 이마에서 흐르고 옷을 적시며 온몸을 젖기 시작할 때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서서히 스며든다. 오래되지 않은 공백이었지만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가는 데에는 단 한 번의 결심이면 충분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몸처럼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그렇게 작은 흐름이 다시 이어지고 그 끝엔 내가 나에게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잘했다. 오늘도 내 몸을 위해 작은 무언가를 해냈다. 감사하다. 는 시간들 말이다.


퇴근한 아내와 이른 저녁을 나눠 먹은 뒤, 산책을 나설까 했지만 아내는 주말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았다며 조용히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초저녁에 자겠다고 하는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내의 손을 잡아 침대로 함께 가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의 불과 TV를 껐다. 아주 조용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나는 서재로 들어와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방 안은 조용했고 아내가 먼저 하루를 마감한 덕분에 나에겐 조금 더 많은 조용히 정돈된 저녁이 찾아왔다.


삶이 꼭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각자의 리듬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감정들이 하루를 더 다정하게 만든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또 한 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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