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가족,서로의 요청 하나로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

by 마부자


금주 142일째,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정말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이 생각보다 더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어젯밤 9시에 잠자리에 들고는 평소처럼 새벽에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무의식의 저편에서 쌓였던 피로가 몸을 단단히 붙잡았던 것 같다.


후츄의 부름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 사이로 여름 햇살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은 아직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기 전이라 차분했고, 조용히 방안을 적셨다.


제목: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커튼 사이로 스며든 그 빛을 따라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니, 어제와는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가운 공기가 창문 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닿았다.



다시 찾은 루틴으로 명상을 시작하기전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새벽에 아들에서 연락이 와있었다. 새벽 5시, 아들이 백령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긴 밤을 건너 바다를 지나온 그 아이는, 다시 또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바다는 그렇게 하루 늦게 아들을 내게 데려다 줄것이다.


새벽 5시, 바다를 건너오는 아들의 여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백령도에서 출항한 배에 몸을 실은 그는, 육지에 닿자마자 또 다른 긴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배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고, 다시 광역버스를 타고 광명으로 간다.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마지막으로 지하철을 타고서야 비로소 집에 닿는다. 말 그대로, 모든 대중교통을 총동원하는 하루치의 긴 이동이다.


나는 대략 오후 두 시쯤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함께 나온 선배가 광명역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고 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약 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고생스런 길 위에서도 누군가와 동행한다는 건, 단순한 편의를 넘어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주는 일이다.


그렇게 아들은 3년 만에 백령도를 떠나 육지로 발령을 받았고, 정확히 1년 만에 집에 모습을 드러낸다. 스물다섯이라는 숫자보다 더 성숙한 얼굴, 말수가 줄고 눈빛이 깊어진 그의 모습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지만, 그 끝에 닿은 오늘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조용했다. 육지 위에 선 아들의 발걸음은, 바다 위를 지날 때보다 훨씬 더 분명했다.


어제, 홀로 짐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여러 감정을 삼켜야 했다. 계획은 틀어졌고 마음은 조금 멀어졌으며, 고단한 거리만이 손에 남았다.


그러나 오늘, 문을 열고 들어온 아들의 얼굴을 보니 어제의 그 감정들이 조용히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 덜 말랐던 그리움이 비로소 마른 듯한, 그런 오후였다.


물론 아들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주말이 지나면 다시 포항으로 떠난다.


그 사실이 이미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도, 오늘만큼은 그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백령도에 있다는 말은 늘 한 겹의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땅 위에 있다. 내 곁에 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오늘 하루는 충분히 따뜻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느꼈다. 점심을 거르고 돌아온 아들에게 밖에 나가서 먹을까 조심스레 물었더니, 의외로 집밥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긴 여정을 마친 아이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집의 밥상이라는 건,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는 신뢰와 위로의 증거 같았다. 그래서 밥을 새로하고, 김장김치를 꺼내고, 냉동실 속에 있던 목살을 꺼내 두루치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어머니께 받아온 간장게장을 반찬으로 함께 올려놓았다.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그 음식까지 오늘 내 아들의 식탁에 그렇게 세 세대의 마음이 한 상에 모였다.


평소엔 밥 한 공기도 다 먹지 못하던 아들이, 오늘은 두 공기를 말끔히 비워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말없이 반찬을 맛있게 먹는그 모습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이제 스물다섯. 세월이 흐르고,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 사실이 낯설다가도, 이렇게 밥 한 끼를 나누는 일상 속에서 조용히 마음에 스며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들과 나란히 앉아 커피를 한 잔 나눴다. 작년 5월, 짧은 휴가를 틈타 얼굴을 잠깐 비췄던 이후로 정확히 1년 만에 마주한 자리였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쌓여 있었지만 나는 무겁게 꺼내지 않기로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고 피곤한 몸에 부담을 얹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새벽 5시에 나온 아들과 짧은 인사와 안부만 나누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 좀 쉬어.”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이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든 아들은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코를 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작 몇 마디 주고받은 시간마저도 빼앗은 건 아닐까 싶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이에게, 그 짧은 순간마저 미안해질 정도로.

저녁은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외식을 하기로 했다. 큰아이는 이미 약속이 잡혀 있었지만,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흔쾌히 미루었다.


막내 역시 고3이라는 무게 속에 있지만, 형이 백령도에서 내려온다는 이유 하나로 야간 자율학습을 빠질 결심을 했다. 난 생각했다.



녀석이 형을 그렇게 좋아했었나....


1년만에 온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자리. 나는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회요.” 순간 어리둥절했다. 백령도라는 섬에서 3년을 근무한 아들이 회를 먹고 싶다고 하다니, 상식적으로는 좀 이상했다. 섬이라면 아침저녁으로 싱싱한 회를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터였다.


그래서 무심코 물었다. “거긴 회가 질릴 정도로 나오는 거 아니었어?”


아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회는 섬 안에서도 비싼 음식이고, 회보다 자주 먹는 건 고기라고 했다. 매번 회식을 하면 삼겹살이 기본이고, 회는 가끔 아주 특별한 날에나 겨우 나오는 귀한 음식이라고 했다.


회는 가끔 주말에 직접 낚시를 해서 먹지 않으면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상식을 전해주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음식의 접근성과 같을 거라는 내 단순한 생각은 거기서 틀어졌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의 입에서 ‘회’라는 말이 나온 것이 조금은 짠하게 다가왔다. 회가 먹고 싶다는 말 안에 단순한 식욕이 아닌 어떤 결핍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바다를 매일 보며 살았지만 바다의 맛은 쉽게 닿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속에서 아들은 또 다른 현실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저녁, 우리는 함께 식탁에 앉아 아들의 그 한마디를 천천히 풀어낼 예정이다. 그 안에는 단지 음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가족이란, 그 말의 결을 조용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아내와 딸이 퇴근하고, 막내까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근의 횟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족이 온전히 모인 저녁이었다.


사실 나에게도 오늘의 이 외식은 조금 특별했다. 금주를 시작한 이후로 횟집은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5개월 만에 다시 찾는 자리였다.


고깃집은 이제 술 없이도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지만, 회는 아직까지 나에게 술과 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그 차가운 식감과 비릿한 여운은 오랫동안 소주 한 잔과 함께 기억되어 있었기에, 선뜻 찾기 어려운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들의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회가 먹고 싶다.” 그 말 한 줄 속에는 긴 시간 동안 섬에서 참아온 어떤 결핍이 있었고 나 또한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횟집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아들은 평소처럼 술을 즐기지 않았고 아내와 딸이 간단히 반주를 곁들였으며 나와 막내는 음료와 함께 조용히 회를 음미했다.


술이 빠진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웃음과 조용한 대화들이었다.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선명한 감각으로 회의 맛이 느껴졌고,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 깊게 다가왔다.


과거에는 회를 먹기 위해 술이 필요했던 내가, 오늘은 아들과 함께 회를 먹기 위해 마음을 먼저 내어준 셈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횟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무엇 하나 화려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식사였지만 오히려 그 담백함이 이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들 것 같았다.


가족이란, 이렇게 서로의 요청 하나로 조금씩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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