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8.산책로 중간에서
처음 만난 낯선 손님들

변화란 같은 길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하나에서 시작되는 것

by 마부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이어서 들려온 건 후츄의 낮은 울음소리였다. 아직 잠이 다 깨지도 않았는데도 그 두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대구도심의 아파트 한켠인지 산골 어귀인지 모를 시끄러움 속에서 아침의 문을 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 위엔 이름 모를 새가 매일같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방문이 어느덧 익숙해졌지만, 그 새가 남긴 흔적을 치우는 일은 여전히 약간의 번거로움을 남긴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깨워주는 아침은 어쩐지 덜 외롭다.


명상에 들어가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하나 간절히 떠올렸다. 내 안에 고요히 숨 쉬고 있을, 선하고 강인한 유전자들. 그 치유의 씨앗들이 이제는 천천히 깨어나기를.


어두운 그림자들이 하나씩 물러가기를. 몸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다시 고요하게 만드는 일이기를.


책상에 앉아 건강에 관한 책을 펼쳤다. 보다 정확히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절실한 책이었다. 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과정을 지켜본 전문가의 시선이 담긴 문장들 사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안정을 느꼈다.


내가 늘 해왔던 방식으로, 책을 통해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책은 생각보다 빠르게 읽혔다. 명확한 해답이 적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책 속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정신력’을 말했고, 그다음으로는 식사와 생활 습관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병은 이겨내야 할 존재이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회복은 시작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떤 말보다도 위로 같았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방식이 이 병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천천히 고쳐가면 되는 일이다.



전부 바꾸기보다는 조율하듯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책장을 덮고 서평을 남긴 후 거실로 나가 점심을 준비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며 아내는 아쉬워했고, 식사 후에는 실컷 자겠노라며 다시 침대로 향했다.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오늘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했다. 의지에 대해서, 그리고 긍정이라는 말의 방향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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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자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아내와 습지 산책을 나섰다. 연꽃잎은 어느새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비어 있던 논에도 어느덧 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계절은 아무 말 없이 자기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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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반대편에 있는 팔각정에 들렀다. 이 길은 수없이 걸었던 길인데도, 그곳에 앉아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얼마전 블로그 이웃 동네에 있던 팔각정 천장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구절판을 닮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올려다본 우리 동네 팔각정의 천장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그동안 시선을 조금만 돌렸다면 진작 보았을 모습들이었다.


사소한 여유조차 없이 지내온 내 일상에 잠시 서운해졌다. 돌아오는 길, 산책로 앞에 불쑥 나타난 세 개의 검은 물체에 시선이 멈췄다.


비닐봉지인가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풀을 뜯고 있는 낯선 동물들의 형태가 보였다. 뉴트리아였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도 미동조차 없이 버티는 그 뻔뻔한 모습에 나와 아내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다가가기도 조심스러워 우리는 살짝 길을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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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내가 말했다. “똑같은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길을 다녀온 것 같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오늘은 처음 앉아본 팔각정이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동물도 있었고, 논의 풍경조차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변화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같은 길을 다르게 바라보는 어느 날의 시선 하나에서 시작되는 것. 오늘의 산책은 단지 몸이 아니라 마음에도, 작지만 분명한 움직임을 남겼다.


그리고 내일은, 서울의 병원에 가는 날이다.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일정. 다행히 딸이 함께 동행해주기로 했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 결과의 무게를 함께 나눌 의사와 마주 앉아, 병기의 명확한 경계와 치료의 방향을 이야기해야 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두렵다. 단지 병명이 아니라, 그 병과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정했다. 두려움에 지지 않기로.


그러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할 것이다. 딸의 손을 꼭 쥔 채로, 내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함께 돌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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