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런 역할도 책임도 없는 그냥 '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은 마치 어젯밤 꿈의 잔재라도 되는 듯,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거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니,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뭇가지 위의 새들은 가볍게 몸을 털며 아침을 맞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장면 앞에서는 언제나 인간보다 동물들이 하루를 더 단정하고 의미 있게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목: 풀꽃.3기죽지 말고 살아봐꽃 피워봐참 좋아.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짧은 명상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으려던 순간, 문득 눈에 띈 건 마우스패드 위에 남겨진 후츄의 흔적들이었다. 녀석이 앉았던 자리엔 그의 털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그것들은 오늘도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운동 후 청소기를 돌리며 깔끔하게 정리했을 터지만, 오늘은 그 역할을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로봇청소기에게 맡기기로 했다.
처음 그 기계가 집에 도착했을 땐, 꽤 믿음직한 가사도우미를 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은 늘어났고, 이제는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청소가 귀찮을 때 버튼 하나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편리함은 아직도 충분히 유효하니까.
다만 문제는 그 녀석이 일하는 동안 내내 나를 불러대며, 내가 알아서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효율은 떨어졌지만, 아직은 완전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애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관계들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은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내칠 수 없는.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둔갑한 채로 곁에 남아 있는 것.
“청소를 시작합니다.” 단정한 목소리를 낸 뒤, 로봇청소기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거실을 순찰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계의 무심한 외형 속에 담긴 집요한 성격은 이미 익숙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내 발가락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목적은 바닥 청소겠지만, 그 방식은 거의 위협에 가까웠다. 슬며시 밀착하며 돌진해오는 그 작은 몸체는 마치 이 집의 영역 주권을 두고 은근한 도발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자리를 피하면 곧바로 방향을 틀어 따라오고, 가만히 서 있으면 살짝 긁고 지나간다. 청소라기보다는 나를 겨냥한 작고 집요한 장난 같았다.
바퀴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도는 모습에서, 이 녀석이 혹시 나를 감지하는 센서라도 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자리를 옮겨도 여지없이 따라오는 그 기계는 생각보다 존재감이 강했다. 무생물인 듯 하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태도였다.
결국 나는 조용히 거실로 청소기를 몰아내고 서재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이내 몇 번, 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기계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 방식이었을 것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포기했는지, 청소기는 본연의 임무에 몰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청소기 안을 열어보니 제법 많은 후츄의 털과 먼지가 모여 있었다. 평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들이, 이렇게 모여 있으니 꽤 무겁게 느껴졌다.
1차로 청소기를 비우고 다시 한번 돌린 끝에야 집 안이 어느 정도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청소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눈앞에 끌어와 인정하고 처리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피하고만 있어선 해결되지 않는다. 마주하고, 치우고, 다시 깨끗해질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토요일 아침, 아내와 막내는 늦잠을 잔다. 짧은 독서를 마쳤고, 로봇청소기와의 기묘한 신경전을 끝낸 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외출을 준비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현관문을 재빨리 열었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는 우리 집 문을 향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낯선 남자가 집을 찍고 있는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짧고 굵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남자 역시 놀란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보니 택배 기사님이었다. 며칠 전 아내가 홈쇼핑에서 주문한 바지를 문 앞에 두고, 배송 완료를 인증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악의도 없는 두 일상이 충돌한 순간이었다.
서로 놀란 채, 말없이 마주 선 순간이었다. 택배기사님도 나도 눈을 크게 뜬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내 발 앞에 떨어진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몸을 숙여 휴대전화를 주워 들고는 조심스레 그에게 건넸다.
혹시라도 액정이 깨지진 않았을까, 고장이 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그의 손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괜찮네요”라고 말했다. 나도 그 말에 안도하며 웃음을 지었고, 긴장으로 굳어있던 공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내가 먼저 “죄송합니다”라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자, 택배기사님은 오히려 더 미안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제가 더 죄송합니다”라고 답하셨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이없지만 서로 놀란 아침의 해프닝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당황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탑승했다.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채 말없이 서 있는 그 시간은 묘하게 어색하면서도 인간적인 느낌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정적 속에는 조금 전의 놀람과 민망함, 그리고 그것을 웃음으로 털어낸 두 사람의 이해가 담겨 있었다.
세상은 가끔 이렇게 우리를 민망하게 만들고, 또 그 민망함을 나눌 사람을 옆에 세워놓는다. 별일 아닌 일이 누군가와의 짧은 유대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같은 정적을 공유하며 1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웃으며 서로에게 ‘안녕히가세요,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혼자서 산책을 나섰다. 예전에는 두세 시간씩 책을 붙들고 앉아 있어도 정신이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는데, 요즘은 글자에 집중하는 일이 생각보다 버겁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책보다 더 효과적인 건 때때로 이렇게 혼자만의 걸음이다. 예전에는 운동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이제는 걷는 일이 더 적당하게 느껴진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돈하고, 그저 걷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다. 걷는 동안에는 특별한 고민도, 뚜렷한 생각도 없었다. 살짝 따가운 햇살이 피부를 스치고, 그 틈을 파고드는 바람이 몸을 감쌌다.
그저 그렇게 바람에 스치우듯 한참을 걸었다. 생각이 사라지는 그 짧은 시간, 나는 아무런 역할도 책임도 없는 그냥 '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 없는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아내와 막내는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고 있었고, 내가 현관문을 열자 “어디 다녀왔어요?” 하고 물었다.
“바람 좀 쐬고 왔어.” 짧게 대답하며 샤워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았다. 아내가 정성스레 깎아준 과일을 먹으며 몸을 쉬게 뒀다. 그렇게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감정도 없이 하루는 조용히 흘러갔다.
저녁엔 별다른 산책도, 약속도 없었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말이 없어도 괜찮고,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편안한 이런 관계가 결국 삶에서 가장 소중한 온기인지도 모른다.
누구의 하루도 방해하지 않고, 누구의 감정도 무겁게 만들지 않으며, 그렇게 나란히 흘러가는 저녁이 왠지 모르게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