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을 풀고 거실로 나갔다. 창밖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빛은 조용히 창틀을 넘어왔다. 빛이 고르게 번지는 날의 창문은 묘하게 마음까지 정돈시켰다.
가만히 바라본 멀리의 나무들은 바람에 몸을 맡기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말을 걸어오듯, 아주 작은 속삭임 같은 날씨였다.
제목: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나교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명상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현충일이었다. 오전 10시,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 추념식 방송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의 헌화 장면, 묵념의 순간, 모두가 잠시 말을 멈춘 그 시간에 자연스럽게 내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든 동생.
평소였다면, 지난주 즈음 묘역에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발걸음을 미뤘다. 내내 잊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불현듯 미안함이 훅 밀려왔다.
가끔은 이런 날, 계절이나 기념일보다 마음의 시계가 먼저 반응한다. 생각은 애써 누르려 해도 몸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나는 조용히 동생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마음은 분명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이 내 안에 남긴 긴 여운을 천천히 되새겼다. 점심을 먹고, 소화를 핑계 삼아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늘 가던 연꽃습지 대신 오늘은 방향을 달리했다.
강변도로. 작년 아내의 재활을 위해 참 많이도 걸었던 길이다. 한때는 거의 매일같이 이 길을 걸었다. 가끔은 내가 또 가끔은 아내가 먼저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새기던 날들이 이제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그 길을 오늘 다시 걷기로 한 것이다. 무언가를 되돌아보려는 마음이었는지, 단지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집 앞 골목길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제법 밝았지만 구름이 많아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딱 좋았다. 딱 오늘 같은 오후에 어울리는, 무겁지 않은 하늘.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용했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그 바람은 구름을 밀고 가듯 부드럽게 피부를 스쳤다.
그곳에 우리가 함께 남겨놓은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멈춰서서, 나도 모르게 아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건강한 얼굴. 걷는 발걸음도 부드럽고, 숨소리에도 여유가 느껴졌다.
강도, 나무도, 시간 속의 강변도로는 언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오늘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공사가 어느덧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강변로 끝자락에 펜스가 설치되고, 그 안쪽으로 별도의 산책로가 새로 나 있었다.
예전에는 자동차, 자전거, 사람이 한 길로 뒤섞여 다녀야 했고, 그 사이사이에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차도와 산책로가 나뉘어, 사람들은 조금 더 안심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펜스와 길 사이로 길게 놓인 화단도 새로 조성되어 있었다. 꽃이 피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벽색으로 칠해진 펜스와 산책로 위로 부드럽게 드리운 그 선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단정해졌다.
길이 바뀌면, 시선도 달라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예전의 그 자리에 아내가 주저앉아 잠시 쉬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런 멈춤 없이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그때와 지금 사이에 지나온 계절들이 문득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예전보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걷는다는 건 어쩌면 지나온 시간을 몸으로 다시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길을 ‘지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눈에 익은 풍경은 대개 안도감을 주지만, 그것이 너무 익숙해지면 무심함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을 잠재운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그 무심함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냥 지나치던 오래된 펜스에 누군가 페인트칠을 새로 해놓았다. 색은 여전히 낡은 벽 위에 덧입힌 듯 어설펐지만, 그 어설픔이 오히려 마음을 움직였다.
산책로 옆 텃밭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풀을 뜯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땅을 매만지고, 햇빛을 받으며, 그 자리에 ‘있는’ 모습 자체로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자전거 핸들에 걸린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노래.
그 뒤를 따라 걸어가는 어르신의 등산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그 규칙적인 소리조차 오늘은 낯설게 들렸다.
이 길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흘려보내며 지나쳤던 걸까. 익숙한 것들 속에도 여전히 새로움은 숨어 있다. 변하지 않는 듯한 길 위에도 매일의 다른 감정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편으로는 내가 오늘 느낀 ‘다름’은 풍경이 바뀐 탓이라기보다는, 그 풍경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걷는다는 건, 결국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조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오늘, 아주 조금 더 부드러워진 마음을 발견했다.
하루라는 길 위에 놓인 익숙한 풍경들, 그 틈새로 스며든 낯선 기척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처음에는 그냥 ‘소화도 시킬 겸’이었고, 그 다음에는 ‘오랜만이니까 조금 더’, 그러다 보니 어느덧 만보를 넘겼다.
집 앞에 다다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순간, 아내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며 한마디 했다.
“이게 누가 강변도로 가자고 해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처음에 운동도 될 겸 걷자고 한 사람, 나 아니고 당신이었거든요?”
“말은 내가 했지만, 방향 잡은 건 당신이었잖아!”
“나는 그냥... 인도 위를 성실히 따랐을 뿐인데…”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향해 장난 섞인 탓을 늘어놓았고, 웃음을 참지 못해 결국 둘 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만보를 걷고 돌아온 하루의 끝은, 피곤한 다리와 웃는 얼굴.
결국 오늘도, 뜻밖의 운동과 뜻밖의 소소한 다툼 덕분에 우리 사이에선 또 하나의 이야기거리가 생겼다.
그러니까, 오늘의 산책은 꽤 괜찮았다. 아주 많이 걸었고, 꽤 많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