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개표 방송을 보느라 늦게 잠들었다. 깊은 밤, 환호와 탄식이 뒤섞인 숫자들의 파동을 따라가느라 잠이 늦어졌고, 그 여파는 아침 몸의 무게로 남았다.
평소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거실 창문을 열었다. 동쪽 하늘에 서서히 번지는 빛. 여전히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또 나를 살아내는 사람으로서, 해는 매일의 출발선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긴다.
제목: 바람에게 묻는다
바람에게 묻는다
지금 그 곳에는 여전히
꽃이 피어었던 달이 떴던가
바람에게 듣는다
내 그리운 사람 못 잊을 사람
아직도 나를 기다려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던가
내게 불려줬던 노래
아직도 혼자 부르며
울고 있던가.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하루를 시작하기 전, 단 하나의 소망과 희망을 담아 짧은 명상을 했다.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기를.
불확실한 내일 앞에서도 오늘 하루만은 온전히 살아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책상에 앉았다. 출근하는 두 사람에게 평소처럼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그 고요한 여운 속에서 잠시 TV를 켰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의 일상, 말과 표정, 짐작할 수 없는 무게들. 그들을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나를 지키는 일 또한 어쩌면 하나의 통치와 다름없다는 것을.
오늘은 대구 중심가에 있는 영상의학과를 찾았다. 혹시 모를 전이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가슴 CT를 촬영해야 했기에, 지하철을 탔다.
낯선 병명과 함께하게 된 이후로 병원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 안은 여느 날처럼 사람들로 붐볐지만, 오늘따라 그 일상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출근 중이고, 누군가는 약속 장소로 향하고, 또 어떤 이는 사랑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그들과 다른 의미의 걸음으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도 우울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들의 삶처럼 나의 이 순간도 삶 같았다.
영상의학과에서 받은 CT 결과는 다행히도 '전이 없음'이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안도감은 컸다. 의사의 담담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안으로 파고들던 불안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자료를 받아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확실히 아침과는 달랐다. 햇살도 그대로인데 마음이 가벼우니 풍경조차 따뜻하게 보였다.
집에 도착해 막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으려는 찰나,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직원들이 모두 외근을 나가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다며, 혹시 시간이 된다면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1일 1식’이라는 구실로 점심은 생략이 당연했는데, 요즘은 체력을 키워야 한다며 삼시세끼를 꼬박 챙기는 나를 알기에 건넨 연락이었을 것이다.
다시 외출복을 챙겨 입고 딸이 있는 회사 근처로 향했다. 걷는 발걸음이 느리지만 가볍게 느껴졌다. 우리는 회사 인근의 오래된 밀면집에서 만두까지 시켜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딸은 생각보다 침착해 보였다. 내일이 되면 확실한 진단이 나오겠지만, 미리 알아본 결과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은 적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많은 생각을 정리해본 듯한 표정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딸은 회사를 향해 돌아갔고, 나는 가득 찬 배를 소화시킬 겸 길을 돌아 집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피곤하다며 지름길을 택했을 거리지만, 오늘만큼은 걷고 싶었다.
따가운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부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몸보다 마음이 먼저 고요해졌다.
어느새 다가온 초여름의 푸른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나무도 사람도, 나 자신도, 너무 빠르게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괜찮아지는 날들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조용한 징조 하나를, 걸음 속에서 알아차린 날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양치였다. 밀면과 만두의 콤보가 남긴 여운은 오래가지만, 입안에 오래 두고 볼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거울 앞에 선 내 얼굴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었다고 해두자.”
병원도 무사히 다녀왔고, 딸과 밀면도 나눠먹었고, 햇볕도 적당히 쬐었다. 이 정도면 중년의 하루로는 꽤 흠 잡을 데 없는 스코어다.
다만 내일 진료 결과가 최종적으로 나올 테니, 오늘 밤엔 밀면 대신 된장국처럼 심심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정말이지, 앞으로는 병원 예약보다 딸과의 점심 약속이 더 많아지길. 가끔은 병보다도, 그런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더 큰 약이 되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아주 은근하게 괜찮았던 날.
그렇게 적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