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5.내가 먼저 무너지듯
아파할 필요는 없다.

by 마부자

오늘은 병원에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검사 당일, 의사에게서 병명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최종 결과를 '확진' 받는 날이었다.


마음 한켠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또 다른 마음 한켠엔 ‘혹시’라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고,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간절했던 가능성 하나.


어차피 ‘암’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에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많이 덤덤해졌다고, 이젠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니었다.


결과를 듣는 전날 밤, 여전히 꿀잠을 자는 경지엔 이르지 못한 멘탈이라는 걸, 새벽 두 시를 지나 세 번째 잠에서 깬 내가 말해주었다. 반복된 뒤척임 끝에 결국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바람이 아직 차가운 아침이었다. 그 찬 기운 속에서 짧게나마 명상을 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일터로 향한 뒤, 집안을 조용히 정리하고, 아주 천천히 외출 준비를 마쳤다.


이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분주했지만, 내 몸짓은 자꾸만 느려졌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게 이 순간을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처럼 그렇게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오늘의 진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같았지만 마음은 어딘가 떠있는 듯했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병원은 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 한켠에 자리를 잡았지만, 기다리는 한 시간이 마치 억겁처럼 길게 늘어졌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담담하다 해도, 속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대기 인원이 적었는지 예상보다 일찍 이름이 불렸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지옥의 문턱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발걸음, 말라붙은 입술, 높아진 맥박.

진료실로 들어섰고, 의사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지난번에 교수님께 들으셨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결과는 그대로인가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렷하게 말했다.

“네, 편도암이 맞으십니다.”


그 말은 유리처럼 또렷하고 단단하게 내 귀를 뚫고 들어왔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몸속의 신경세포들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생각은 멈췄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리고 돌아온 의사의 말.

“그러나 다행인 것은, 바이러스성 암, 즉 양성암입니다. 예후가 좋고, 치료 반응도 좋으며, 5년 생존율도 꽤 높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여러 카페와 논문, 인터넷을 통해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다. 바이러스 음성일 경우 치료 반응이 낮고 완치율도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양성’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다.그것은 위로 받은 기분이 아니라, 살 수 있다는, 견딜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에 살짝 기댄 안도의 반응이었다.


의사의 ‘암입니다.’ 이 말이 이제는 그저 의학적 용어일 뿐인 듯, 그는 담담하게 서울로 전원할 예정이라고 들었다며 소견서와 검사 자료는 모두 준비해줄 테니, 병기가 몇기인지는 치료 예정 병원에서 다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양성이라 다행입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도 안다. ‘암’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왜 그 말이 입 밖으로 자꾸 새어 나왔을까. 어쩌면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이, 내게 그 문장을 말하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의사의 눈을 마주보며 가볍게 웃기도 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건 슬픔을 이기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고, 조금은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 같기도 했다.


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어쩐지 몸속에 있던 종양의 절반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무게 하나가 내려앉은 건 분명했다.


이제 시작이다. 싸움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단단한 중심이 되기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조금 울고, 조금 웃고, 조금 쉬기로 한다.


병원을 나섰다. 햇살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심 속 미세먼지가 가득 하더라도 오늘은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따스한 공기 사이로 들어온 현실이, 이제는 아주 조금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언제나 평범한 일상, 간단한 안부, 때론 농담 따먹기만 오가던 그곳 바로 우리가족만의 단톡방, 오늘은 조금 다른 말을 써야 했다.


“편도암 확진이래. 다행히 바이러스 양성이라 예후는 좋대. 병기는 서울 병원 가서 다시 진단받는대.”

잠시 동안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읽음 표시만 하나 둘 줄어갔다. 그리고 곧, 짧지만 진심이 담긴 메시지들이 돌아왔다.


“아빠, 괜찮을 거야.”

“다행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자기야! 일단 밥 잘 챙겨 먹어요, 저녁에는 맛있는 거 먹자”


아이들의 말은 늘 현실적이었고, 아내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 메시지들 속에서 나는, 이 병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평생 아프지 않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이제 어쩔 수 없으므로 이건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싸우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게, 나를 다시 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연꽃습지로 향했다.

초저녁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따스했다. 우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너는 바람처럼, 대화도 길지는 않았지만, 깊었다.


“양성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암인데…”

“암이라 무조건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린 서로, 그 어떤 확신도 내릴 수 없었다.


답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애매함이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 나는 아무 데도 안 아파. 어디가 아프거나, 먹지도 못하고, 기운이 없거나 그렇진 않아. 그러니까 치료 시작할 때까진 우리, 그냥 웃으면서 지내자.”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지금 이 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이라는 걸.

사실 지금 나는 아무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건강해진 기분이다. 몸 어딘가 숨어 있다는 이 ‘암’이라는 존재에 내가 휘둘릴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아프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먼저 무너지듯 아파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맞서 싸워야 할 상대라면, 지금처럼 체력을 다지고, 잘 먹고, 잘 자고, 조금 더 웃을 수 있는 이 시기가 내게 이겨낼 준비를 할 시간을 내려준 하늘의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했다.


이 시기를 이렇게 받아들이게 해준 오늘이라는 하루에,

그리고 내 곁에 조용히 함께 걸어준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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