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예보된 하늘에는 회색구름이 가득했다. 창문을 열자 어제와는 전혀 다른 바람이 서재로 밀려들어왔다.
태양이 쏜 화살처럼 찌르듯 책상에 내리꽂던 햇살 대신, 산이 품은 바람을 입김으로 불어넣듯 창을 통해 방을 감싸주었다.
오전 독서를 마친 후 짧은 체력 회복을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어제에 이어 스티브 바틀렛의 <CEO의 다이어리>영상을 재생했다.
“점검 없는 비행은 결국 추락이다.
변화 없는 삶 역시 결국 퇴보다.
진짜 무서운 건 실패가 아니라
방향을 잃고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와이 대저택 제공
방향.
방향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어떤 지점일 수도 있고, 마음이 끌리는 쪽일 수도 있다. 혹은 모두가 가는 곳이라 믿고 뒤따라간 길일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그 방향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왜 그리로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오래 걸어왔다는 이유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이유로 그 방향을 계속 유지한다. 스티브 바틀렛이 지적한 ‘방향을 잃고도 멈추지 않는 삶’은, 그래서 어쩌면 실패보다 더 무서운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분명히 ‘점검의 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정비다.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던 나의 삶도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을 묻는 질문에 서툴러져 있었다.
삶의 여러 선택들이 그 순간엔 정답 같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왜 그 길을 택했는지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 선택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방향’이었는지도 모른다.
방향을 묻는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인지, 그 목표는 여전히 내게 유효한 것인지, 진심을 가지고 가고 있는지.
방향은 선택이 아니라 점검이다. 한 번 정한 길이 영원히 맞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꾸준히 확인하고 수정해나가는 태도야 말로 방향을 잃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가끔은 한 걸음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은 두려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되돌아가면 손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멈춤은 손해가 아니다. 방향을 잃고 계속 가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진짜 실패는 길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걷는 데 있다.
나는 요즘, 나의 병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 이 질문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지금 내가 가야 할 치료의 길은 과연 나를 어떤 방향으로 안내해줄 것인가.
앞으로 펼쳐질 방사선치료 혹은 그보다 더 낯선 단어들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이 순간, 나는 마치 갈림길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미 아픈 것보다 앞으로 더 아프게 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를 더 깊은 두려움으로 밀어넣는다.
이 길을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고, 또 다른 길을 택하면 너무 늦을까 두렵다. 의사 앞에서 던져야 할 질문들이 머릿속에 가득하지만, 정작 입을 열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병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나를 작게 만들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방향을 묻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 병이 내게 찾아왔다는 사실은 더는 바꿀 수 없지만, 내가 어떤 태도로 이 병을 마주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단지 ‘낫기 위해’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이 길을 걷고자 한다.
치료는 나를 지키는 과정일 뿐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 떠밀리듯 이 길을 가지 않으려 한다.
나는 지금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점검하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붙든다. 그것만은 놓치지 않으려 한다.
방향을 잃은 채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 삶이 아닌, 잠시 멈추고 나를 위한 길을 다시 찾는 삶을 택하고 싶다.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의 삶을 향한 결정권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오늘 ‘방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방향은 불변의 선택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점검의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