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비가 그치고 난 뒤의 하늘은 대체로 후련하다. 오늘 오후도 그랬다. 창밖으로 햇살이 밀려오며 커튼을 툭툭 건드렸고 나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도시의 공기가 먼저 밀려들고, 바로 이어 태양이 모니터의 빛을 삼켜버렸다. 인공의 조명보다 확실한 자연의 확신이었다.


무겁지 않은 가벼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오늘도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운동 루틴에 맞춰 귀로 들은 책은 존 레이티, 에릭 헤이거먼의 <운동화 신은 뇌>였다. 이 책 속에서 나를 멈추게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혹시 당신은 불안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는가?
이걸 절대로 잊지 않길 바란다.

그런 본능은 당신이 충분히 거역할 수 있다.
행동할 수 있다.
당신은 인지를 재구성할 수 있고
당신이 한 그 행동 하나로
실제로 재구성을 하게 된다.”

하와이 대저택 제공


본능.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심지어 자주 핑계처럼 사용하는 말. ‘그건 본능이었어’ 혹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었어’. 나는 오늘 이 문장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본능을 유전자의 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고유의 기질로 이해한다. 개가 짖고 새가 날고 고양이가 낙하할 때 몸을 뒤집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내면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본능, 과연 진짜 본능일까?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흘러가며 문득 떠올랐다. 내가 불안을 느낄 때마다 회피하던 행동들. 누군가의 기대에 주눅 들어 말하지 못했던 말들. 새로운 환경 앞에서 두려워 돌아섰던 그 수많은 순간들.


나는 그 모든 회피를 ‘본능적인 방어 반응’이라고 포장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단지 반복된 회피의 습관이었을 뿐이라고.


습관은 반복으로 생긴다. 반복은 무의식을 만들고, 무의식은 자동 반응을 일으킨다. 그렇게 형성된 자동 반응이 어느 순간부터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본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습관의 결과라면, 나는 내 본능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새로운 행동을 통해, 새로운 반복을 통해, 나를 다시 훈련시킬 수 있다.


특히 불안이라는 감정 앞에서 더욱 그렇다. 불안은 본능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 아니다. 불안은 단지 낯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일시적인 알람에 불과하다.


그 알람이 울릴 때 도망치는 대신, 단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두뇌는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인식을 형성하기 시작한다고 책은 말한다.


행동은 인지를 재구성한다. 이 말은 곧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반복한 행동의 결과’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본능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 나는 어떤 습관을 ‘본능’처럼 믿고 있는가?


본능이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스스로의 본능을 새롭게 짜고 있는 중일 것이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그것이 운동이라서가 아니다. 두려움 앞에서 멈춰 서는 오래된 습관을 조금씩 걷어내기 위해서다.


페달을 밟는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행동하고, 그 행동은 나를 다시 쓰는 문장이 된다.


나는 오늘 ‘본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본능은 자신이 만들어낸 습관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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