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희미한 햇살에 눈을 떴다. 빛이라기보다는 그림자에 가까운 흐린 기운이 방 안에 감돌았다.
어제 하루 병원을 오가는 동안 줄곧 조였던 긴장 때문인지, 혹은 차갑고 더운 바람을 교차로 맞은 탓인지 몸은 쉽게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묵직했다. 오늘은 마치 몸도, 마음도 고장이 난 기계처럼 무력했다.
커튼을 젖히자, 구름 한 점 없는 잿빛 하늘이 드러났다. 맑지도 탁하지도 않은 흐림. 변덕스럽기로는 요즘 내 마음과 다를 바 없었고, 그래서일까 어쩐지 묘하게 익숙한 풍경 같았다.
이른 명상을 마치고, 출근길에 나서는 아내와 막내에게 우산을 챙겨주었다. 남겨진 집 안에서 빨래를 찾아 세탁기에 넣고 청소를 시작했다. 조용한 공간 속, 익숙한 청소기 소음만이 들렸다.
간단히 끝낼 생각이었지만, 청소를 마치고 보니 빨래도 끝나 있었다. 건조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앱에서는 보푸라기 필터를 감지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되었다. 수리를 위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곧 영상으로 접수가 이어졌다.
가장 빠른 방문 날짜를 선택했지만 7월 2일이라는 안내가 떴다. 갑자기 사용빈도가 높아진 에어컨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매일 쓰는 생필품이 된 건조기인데도 이렇다니, 불편함이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닿았다.
이미 세탁을 마친 옷들을 다시 돌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베란다에 나가 한동안 잊고 지낸 빨래 건조대를 꺼냈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거웠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 앞 치과로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기 전, 치아 상태를 미리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방사선이 목부위에 집중되기 때문에 치아 혹은 잇몸이 상태가 안 좋으면 염증이 생겨 치료를 중단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미리 치아 상태를 알아보고 사전에 가능한 관리를 해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충치는 다행히 없었다. 다만 향후 잇몸 치료는 필요하다는 진단을 들었다.
방사선과 간호사가 스케일링과 불소도포를 받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을 해주어 난생처음 불소도포라는 것도 받아 봤다.
내 몸 한가운데 자리잡은 작은 혹 하나를 제외하면, 요즘 내 몸은 오히려 건강해진 것 같았다.
세 끼 식사를 잘 챙기고, 피 검사를 받고, CT와 엑스레이로 몸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어쩌면 그 혹이 생기기 전에는 이토록 내 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명백했다.
조금만 더 일찍, 조금만 더 정성껏 들여다봤다면 어땠을까. 그런 아쉬움은 자연스레 따라오지만, 이제 와 후회로 남겨두는 건 의미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아무 통증 없이 준비할 시간을 허락받았다는 것에 감사하려고 한다. 후회는 지나가고, 감사는 마음에 남는다.
집으로 돌아오니 베란다 한 켠에서 선풍기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조용한 회전은 바람을 만들었지만, 내 안의 답답함까지 식혀주지는 못했다.
장마철. 이렇게 축축한 날들이 이어지는 계절에, 앞으로 일주일 동안이나 빨래를 자연건조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짜증은 점점 커졌다.
게다가 다음 주부터는 내가 이 집에 없다는 현실은 그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짜증은 그냥 짜증이 아니라, 불안과 무력함이 빚은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건조기의 증상을 하나하나 검색하다 보니, 필터 내부에 작은 자석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청소 중에 그 자석이 빠지거나 분실되면, 지금처럼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얼핏 들으면 소소한 문제지만, 삶의 불편함을 만드는 건 늘 이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곧바로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친절하게 응대했고, 영상통화로 연결해 현재 상태를 확인해주었다. 예상대로, 자석은 분실된 게 맞았다.
단가는 2,700원. 싸다면 싼 금액이지만, 그 조각 하나로 지난 몇 시간이 흐트러졌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방문 수령도 가능했지만, 오늘은 이미 빨래를 끝냈기에 택배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화면 너머로 이어지는 상담, 택배로 보내오는 부품. 불편함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분명 위안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작정 고장이 난 기계를 들고 센터로 향했을 것이다. 지금은 카메라 렌즈 하나로 고장도, 원인도 확인되고, 해결까지 가능하다. 삶은 이렇게 편리해졌고, 나도 그 안에서 조금은 덜 힘들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에 존재감 없는 작은 자석 하나가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질이 뚝 떨어진다는 것도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2,700원이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
편리한 현실과 불편한 현실이 한데 뒤섞인 순간, 그 균형을 잡아가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빨래를 널고, 진료를 받고, 고장을 확인하고, 전화를 하고, 또 다시 택배를 기다리는 하루. 특별할 것 없는 반복 속에서도 감정은 숨죽인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밀려났다.
장마는 하늘만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도 눅눅하게 적신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 날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작은 안정을 찾았다.
스스로의 몸을 돌보고, 내 앞에 닥친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 애쓴 하루. 무언가를 단숨에 바꾸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정리해 나가는 감각은 분명 존재했다.
아쉬움도 있었고, 짜증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다시 고요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는 지나갔다.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이 불완전함 속에서도 내 삶을 조금씩 가꿔가고 있다는 사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나는 나의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