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5.막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응원해주었다.

by 마부자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낯선 초여름의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아직 태양은 구름 뒤에 숨어 있었고, 서편에서 오는 바람은 늦가을처럼 느껴졌다.


평소와 다른 낯선 새소리가 들려오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몸속의 남은 간밤의 잠을 털어냈다. 그리고 명상으로 오늘 하루도 조용히 시작되었다.


제목: 섬에서

그대, 오늘

볼 때마다 새롭고
만날 때마다 반갑고
생각날 때마다 사랑스런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경이 그러하듯이
풀잎이 그렇고
나무가 그러하듯이.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아내는 평소처럼 출근을 서둘렀고, 막내는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살짝 웃는 얼굴로 다가와 작고 가벼운 택배 박스를 내게 건넸다.


무슨 책이냐고 묻자, 아이는 무심한 듯 말했다. "병원에 계시면 적적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그리고는 현관을 나서며 고개를 옅은 미소를 내게 전해주었다.


두 사람의 분주한 출근 시간이 지나고, 나는 식탁에 앉아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박스를 열었다. 택배 상자 안에는 네 권의 책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맥베스>, <베니스의 상인>,

그리고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롬의 잃어버린 명예>. 모두 세계문학 고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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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표지에 간결한 이미지, 명조체로 쓰인 제목이 단정하게 놓여 있는 모습. 갈색 택배 박스 안에 나란히 들어 있는 네 권의 책은 마치 인큐베이터 속에서 잠든 네 명의 쌍둥이처럼 느껴졌다.


작은 상자 하나에 담긴 건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아빠가 혼자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 조용한 메시지였다.


읽으라는 말도, 서평을 써달라는 말도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아빠를 응원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평소에 쓰는 글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는 그 무언의 고백이 이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건 단지 물건 하나를 건네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엔 읽었던 시간, 고민했던 순간, 그리고 건넬 사람을 떠올리며 망설였던 마음까지 담겨 있다.


책은 그렇게 의미를 담는 방식이 조금 특별하다. 결국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무엇을 줄까보다 어떻게 전하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책을 선물할 수 있는 사이란 건 그 자체로 귀한 관계다.


책이라는 선물은 늘 그렇다. 말로는 다 못 전할 사랑을, 어색함을 덜어내고 무게를 담아 전해준다. 막내는 그렇게 말보다 마음이 먼저 전해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 응원해 주고 있었다.


상자 안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 책꽂이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박스속에서 책을 꺼내 며 집어 드는 내 손끝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 담겨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셰익스피어를 펼쳤다.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햄릿>. 그리고 <리어왕>은 이미 먼저 읽었다.


그리고 오늘 받은 두 권 <오셀로>와 <맥베스>까지 더하면 일단 7월 중으로 4대 비극을 완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여섯 권이나 읽는 셈이 된다.


나름대로 클래식한 독서의 족적이라 느껴지면서, 스스로가 조금은 고전 전문가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오전 독서를 마친 후에는 몸을 잠시 움직이고, 책 한 편을 영상으로 다시 보며 글을 남겼다. 점심을 챙겨 먹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창밖으로는 조용한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산책을 나가기엔 선선함보다는 축축함이 앞섰다. 나는 조용히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오후의 시간은 그저 그런 고요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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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화로 신청했던 건조기 부품이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손톱만 한 작은 자석 하나가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작아서 놀랄 정도였다.


그 조각을 필터 자리에 껴 넣고 전원을 켜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건조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어딘가 허탈하면서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저 자석 하나였다. 하지만 그 작디작은 부품 하나가 며칠간 내 일상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돌이켜보니,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사람은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무엇보다 그 불편함을 그냥 두지 않고, 전화하고 알아보고 해결했던 내가 조금 기특했다. 생각보다 빨리 해결된 건 내 덕분인 것 같아 베란다에 걸려 있던 빨래를 옮기며 괜스레 뿌듯했다.


저녁에도 서늘한 날씨가 이어졌다. 퇴근한 아내는 서늘한 날씨 때문인지 따뜻한 국물이 당긴다며 말했다. 냉동실에 있던 어머니표 사골국을 꺼냈다.


한때 ‘떡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떡을 좋아하던 아내를 위해 늘 준비해두는 떡도 꺼냈다. 그리고 나를 위한 만두도. ‘만두귀신’이라는 별칭은 억울하지 않았다.


사골국물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 국물을 떠먹는 아내의 조용한 표정, 그리고 육즙이 가득한 만두를 한 입 베어물 때의 감촉까지. 조용하고도 다정한 저녁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내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밤 11시 20분. 자율학습을 마치고 막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선물 너무 고마워.” 막내는 말 대신 아침처럼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찡긋 윙크를 남겼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아이의 미소 하나가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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