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둔 창 사이로 스며든 찬 바람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감쌌던 아침. 그러다 바람 끝에 묻은 햇살의 기척에 눈을 떴다. 가볍게 몸을 풀며 일어나 창 앞에 섰다.
동편 하늘, 아파트 모서리를 따라 올라 간 해가 옥상 끝에 걸려 있었다. 여전히 선선한 바람이 등줄기를 타고 스며들어 어제보다 나은 기분으로 명상을 시작했다.
잠시 동안, 아무런 걱정도 없이 오로지 나의 숨결과 나의 존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의 그 고요가 고맙게 느껴졌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무언가라도 먹어야 했다. 현미밥 한 공기에 오리구이, 그리고 고등어 한 조각을 데웠다. 앞으로 치료가 시작되면 이런 음식들이 그리울 수도 있겠지.
먹고 싶어도 못 먹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참 간사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음식 앞에선 입맛이 없다.
호강에 겨웠다는 말이 딱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간사함이 사라지길, 아니 적어도 식탁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며칠째 읽던 <햄릿>을 오늘에서야 끝까지 넘겼다. 모든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고전이 왜 오랫동안 사랑받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햄릿의 이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얼마전 손석희 아나운서가 “질문들” 이라는 코너에서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To be or not to be> 이 문장은 단지 그 순간의 삶과 죽음의 결정이 아니라는 손석희 아나운서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손석희 아나운서는 이 의미를 “이대로냐, 아니냐” 즉, 변화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깊은 고민을 담은 문장이라 해석했다.
오늘 읽은 민음사의 번역가는 이 문장을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옮겨 놓았다. 두 해석 모두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해석의 폭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과 사유의 결이 무수하다는 뜻일 것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왜 이 문장이 수없이 다른 언어로, 또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야만 했는지 오늘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햄릿의 그 대사는 단지 상징적이거나 유명한 문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변화와 갈등 그리고 내면의 흔들림을 응축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물렀고 그래서 쉽게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문장이었고 내가 요즘 수없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 같았다.
오후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영상 하나를 시청했다.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감정은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몸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화가 나기 전에 이미 주먹이 쥐어져 있다거나, 서운함을 느끼기 전부터 가슴이 조여온다거나 하는 그러니까 감정은 말보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신호 같았다.
그 말에 잠시 멈췄다. 요즘의 나는 감정보다는 몸의 반응을 더 자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이 올라오기 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어깨가 뻣뻣해지는 그 느낌들.
나도 몰랐던 내 몸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미련 없이 깔끔한 식사였고 딱 지금의 내 마음만큼 필요한 만큼의 양이었다. 그런 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햄릿>에 대해 느꼈던 것들을 정리해 블로그에 서평으로 올렸다.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단순히 내용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님을 다시금 실감했다.
아마도 오늘의 나는, 이 책에 담긴 질문들을 단지 독서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 더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읽고, 느끼고, 쓰는 일의 그 단순한 과정 속에서 오늘 하루의 감정이 조금 정리되었다. 비워지는 느낌이 아니라, 내 안에 작게 정돈되어 차오르는 감각. 그게 꽤 고맙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오늘도 그런 사소한 깨달음 하나로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싸움을 지혜롭게, 정직하게 견뎌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