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7.정리란 누군가에겐 이별을
뜻할 수도 있음을

by 마부자

이른 아침, 창문을 통과한 서늘한 바람이 이불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찬기에 눈을 떴다. 무의식처럼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엔 얇은 구름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바람은 그 구름들을 재촉하듯 몰아가고 있었다. 꼭 바쁜 출근길 사람들처럼.


짧은 명상을 마친 뒤, 두 사람이 현관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나서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조용히 회색문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부터 6주, 어쩌면 8주 동안, 이 자리에 서서 그들에게 “잘 다녀와요”라고 웃으며 인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그 순간이 어쩐지 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간단히 아침을 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평소처럼 정리만 하고 끝내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길이 구석구석 향했다.


늘 ‘다음에 하지’ 하고 넘겼던 곳, 굳이 손 닿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도 닦고 정리했다. 마음 한켠이 비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걸까.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내가 손쓸 수 없는 자리들이라 더 애틋했던 것 같다. 베란다로 나가 지난 7개월간 말없이 내 곁을 지켜준 율마에게 물을 주었다. 해준 거라곤 고작 물뿐이지만 그 조용한 생명 앞에서 괜히 잘 있으라고 말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오전인데 벌써 정오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며 가만히 돌이켜보니 내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해왔던 일상들이 이렇게까지 귀하게 다가오는구나. 다시 돌아올 걸 안다. 길어야 두 달. 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다시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아닌, 어디론가 밀려나는 느낌은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청소로 데워진 몸을 움직여 페달을 밟았다. 짧은 거리였지만 그만큼의 속도로만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영상에서 마주한 단어, 운명.

그 한 단어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운명은 늘 그렇듯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문을 두드린다. 그 문 너머에 나를 두고 짧게 그러나 깊은 마음을 담아서 글을 남겼다. 점심을 간단히 챙겨 먹고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집 앞 이마트에 들렀다. 이번 주말, 가족들과 함께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해두기로 했다. 보쌈, 김밥, 불고기 음식재료들을 고르는 내 마음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다음 주부터 당분간은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치료가 시작되면 조절된 식단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예고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떨어진 내 몸을 위해 항암에 좋은 음식재료들로 직접 조리를 해서 먹어야 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음식을 일일이 챙겨 먹을 만큼 부지런하거나 철저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치료 이후, 분명 이전과는 다른 식사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식탁 위의 선택이 줄어들고 자극적인 음식은 자제해야 하고 때론 먹고 싶은 것을 앞에 두고도 손을 내밀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만큼은 영양이 아닌 ‘맛’을 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조금은 과하게 자유롭게 군것질도 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도 먹고 커피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음식을 고르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나누는 식사와 그 평범한 순간이 앞으로의 내게 얼마나 특별한 기억이 될지 모르니까.


아내가 퇴근을 하고 금요일엔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막내도 일찍 집에 들어왔다. 미리 삶아 둔 보쌈과 묵은지를 깨끗이 씻고 갓 지은 흰쌀밥과 함께 저녁상을 차렸다.


리액션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막내가 최고의 찬사로 화답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별일 없는 평온한 저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어딘가 낯설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밥을 다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가까운 공원을 함께 걸었다.


아내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먼저 입을 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그래, 오늘 직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집에 와서 보니까, 당신이 집을 싹 치워놨잖아.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좀 그랬어.”


나는 웃으며 가볍게 넘기려 했다.

“아니, 청소를 다 해놨는데 왜 기분이 별로였어?”


아내는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다시 안 올 사람도 아니잖아. 근데 꼭... 다시 오지 않을 사람처럼 집 구석구석을 다 정리해 놓고 간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게... 좀 그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누군가 느닷없이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얹은 듯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너무 내 입장에서만 준비하고 있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단지, 치유를 위한 마음 정리를 하고 싶었다. 몸이 아프다는 걸 받아들이고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걸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집 안의 물건들을 한 번쯤 정리해두고 싶었다.


무언가를 마무리하려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올 준비를 미리 해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내에게는 마치 영영 떠날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정리를 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이별을 뜻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 단순한 감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준비된 마음을 보였고 아내는 준비되지 않은 상실감을 느꼈다.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순간을 통과한 것이다.


산책을 도중 벤치에 나란히 앉아 내 마음을 천천히 아내에게 전했다. 그저 정리하고 싶었던 거였다고 떠나는 게 아니라 다시 잘 돌아오기 위한 준비였다고 아내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느새 미소를 지었다.


그 작은 웃음 하나에 나도 안도했고 그제야 마음 한켠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공원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말보다는 단 음식이 어색함을 더 쉽게 녹여줄 때가 있다. 작은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나란히 들고 웃으며 걸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입안의 달달함으로 감정의 달달함을 채워 넣었다.

이전 25화06.26.To be or not to be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