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9.가족은 그렇게 말보다
마음으로 곁에 남는다.

by 마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부터 더운 공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밤새 돌아가던 선풍기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무겁고 더운 바람을 내뱉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 창가에 섰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 아래, 동쪽의 태양은 벌써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마시며 짧은 명상을 마쳤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작은방 장롱 속 깊이 넣어 두었던 커다란 캐리어를 꺼냈다. 작년,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사용했던 그것이었다.


당시 한 달간 병원 생활을 위해 준비한 노하우가 있어서 인지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능숙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당시 버리지 않고 남겨둔 병원 전용 용품들, 혹시라도 아내가 다시 입원할 일이 생기면 쓰자고 보관했던 것들인데, 그걸 내가 다시 꺼내 쓰게 될 줄이야.


참 인생은 예측불가한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어느 정도 챙기고 혹시나 또 빠진 것이 있을지 몰라 자세한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암 환우 카페를 둘러보았다.


누군가는 치료 내내 침대에만 있었다는 글을 올렸고, 또 누군가는 직장을 다니며 치료를 병행했다고 적었다.

삶의 조건과 회복의 속도는 제각기 달라,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준은 결국 나 자신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의 나를 믿기로 했다.


운동복을 챙기고, 글을 쓰기 위한 보조 모니터와 독서 받침대도 넣었다. 밖으로 나설 수 있다는 의지를 담아 등산복과 외출복도 하나둘 챙겨 넣었다.


정작 하나도 못 입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혹시 너무 많이 입어 낡아버려 버리고 오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후자에 더 가까운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짐 속에는 의지라는 이름의 물건들이 하나둘 쌓여 어느덧 캐리어는 가득 찼다.


저녁은 아내와 막내와 함께 외식을 했다. 오늘이 지나면 식단을 조절해야 하기에 마지막 식사는 내가 메뉴를 고르라 했지만, 결국 막내가 좋아하는 족발로 결정되었다.


두 달간 엄마 곁을 지켜줄 사람이 바로 너라고 말을 전하며 식사를 시작하기전 막내에게 조심스레 부탁을 전했다.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미안함보다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는 책임이 더 앞섰다.


막내는 나를 빤히 보더니 짧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빠. 저 아이 아니에요. ㅎㅎㅎ”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읊기 시작했다.

“혹시 이런 말씀 하시려면요, 아빠. 먼 길 가시는데 잔소리로 기억에 남을지 모르니. 그냥 하지 마시죠! ㅎㅎ"


정말로 내가 하려던 말을 먼저 다 꺼내는 막내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한 마디가 고맙고도 짠했다.


집에 돌아와 일찍 일기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요양병원에 입원수속을 하고 삼성병원으로 이동하여 치료 전 CT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방사선 치료를 위한 얼굴 고정용 마스크를 제작하며, 실제 치료와 동일한 방식의 ‘모의치료’를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 부터 하루종일 빠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또한 내일은 아내와 딸이 함께 간다. 아내는 목요일까지 연차를 냈다. 치료하는 날도 아닌데 혼자 가겠다고 했더니, 딸은 절대 혼자 가게 두지 않겠다며 끝내 고집을 부렸다.


가족은 그렇게, 말보다 마음으로 곁에 남는다.


어쩌면 오늘은, 지난 52년의 삶을 접고 이제부터는 살아내야 하는 새로운 시간을 위한 작은 고별식 같은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나는 우울하지 않았다는 거다. 슬프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담담한 척 연기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조용히 하루를 살아냈다.


모든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소파에서 TV를 보며 있던 저녁 무렵. 평소 나를 자신의 집사로 여기던 후츄가 내 무릎 위로 뛰어올라 뺨을 핥고는 자리를 잡았다.


녀석도 뭔가를 아는 걸까? 아니며 우연인 걸까? 순간, 내가 너무 감상적인 걸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의 상반기는, 오늘로 마무리된다.

이제 남은 건 '다음 생'이라 불러도 좋을 나의 하반기.


괜찮을 것이다.

나는 또 웃을 것이다.


조금 아프고 힘들지라도, 다시 뛸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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