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작은 몸짓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일으켜 베란다 커다란 창문을 열고 큰 쉼 호흡을 하며 깊은 밤의 흔적을 내보냈다.
몇일 동안 불어오던 늦가을 같던 바람이 잦아들고 아침공기에 더운 습기를 머금은 채 내속으로 들어왔다.
제목: 주제 넘게도
주제넘게도
남은 청춘을 생각해 본다
주제넘게도
남은 사랑을 생각해본다
촛불은 심지까지
타버리고 나서야 촛불이고
사랑은 단 한번뿐이라야
사랑이라던데......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6월의 마지막 토요일. 52년을 살아왔던 이전의 인생과 작별을 준비하는 조용한 예고편 같은 주말이었다.
아내는 아직 꿈나라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날들 사이에서 회상과 기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불안이 흘러갔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치는 대신, 오늘은 조심스럽게 책상을 정리했다. 병원에서도 계속 써야 할 글을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하나씩 챙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작년 1월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딸, 그리고 나. 우리 넷이 함께했던 여행이었다.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불과 이주일 전이었다. 사진 속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한 채 3박 4일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신이 나서 웃고 있는 얼굴들. 그 웃음은 아프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고 그저 좋아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진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아내의 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과연 저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이미 예정된 수술과 그 앞날의 두려움을 껴안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걱정 속에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확실한 미래를 몰랐기에 현실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내는 거짓말처럼 후유증 하나 없이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인간이 꿈꾸는 힘이자 동시에 두려움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안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대신, 그 시간에 대비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결국 미래란 두려운 현실을 앞당기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 현실을 준비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시간의 교차점 아닐까. 지금의 나는 다가올 두 달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러면 이 미래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걱정 속에 움츠러들며 하루를 살아갈까.
아니면 이 기회를 기점으로 다시 살아내기 위한 시간을 준비할까.
사실 그 답은 오늘 아침 서랍 속에서 만난 그 사진이 이미 알려주었다. 그때의 아내처럼 그때의 나처럼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향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걸어간다면.
점심에는 오랜만에 쫄면과 찐만두를 만들었다.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야채를 송송 썰어 매콤한 양념장에 버무리니 한 입 먹자마자 입안 가득 살아나는 매운맛은 더운 날씨에 식욕이 뚝 떨어진 날에도 이변 없는 맛을 내는 음식이다.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대구 동촌유원지로 산책 겸 둘만의 데이트를 했다. 햇살이 강해 썬크림을 두껍게 바르고 오랜만에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토요일 오후의 유원지는 생각보다 북적였고 사람들은 여름 문턱에서 아직 남은 봄을 아끼듯 즐기고 있었다.
작년 봄부터 여름까지, 아내의 재활을 위해 수없이 오르내렸던 그 강변길이다. 그러나 이젠 조금 덜 불편한 걸음으로 함께 걸을 수 있게 된 길을 우리는 다시 걷고 있었다.
오늘 오전 책상을 정리하며 떠올렸던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미래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마음과 그럼에도 웃는 얼굴을 선택하고 싶은 내 쪽의 결심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들어주는 그런 아내의 반응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나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강에서 불어오는 늦봄의 바람과 하늘에서 따사롭게 내리쬐는 초여름의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침묵 속에서 이미 우리는 서로의 답이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분명히 괜찮다.
앞으로도 그렇게 괜찮은 순간들이 틈틈이 우리 앞에 도착해줄 거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 하나만 있어도 두 달쯤은 충분히 살아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먼 시간도 가능할 것 같다. 걸음은 느렸지만 발걸음마다 조용히 희망이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