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10일차, 항암 2회, 방사선치료 6회.
새벽부터 창밖을 두드리던 햇살이 병실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세상은 푸른빛으로 아침을 밝히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병실 문을 나섰다. 아직 오전 6시였지만 하늘은 온전히 낮이었다. 오늘 하루가 어떤 결로 흘러갈지 날씨는 벌써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병원 옆 계단을 따라 숲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그저 도심 속 작은 쉼터쯤으로 생각했는데 몇 번을 오가다 보니 나름 깊은 숲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무는 생각보다 울창했고 공기는 짙은 피톤치드 향으로 코끝을 찔렀다. 내 폐는 그 신선한 기운을 가득 삼키며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오늘로 이 산책로는 세 번째였다. 낯설었던 길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가 곳곳에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처음엔 그것의 용도를 몰랐다.
그런데 오늘 한 분이 조용히 그것을 들고 산책로의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길이 언제나 이렇게 깨끗했던 건 누군가의 조용한 수고 덕분이었다는 것을.
아침 일찍 내가 걷는 이 편안한 길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싸리비로 만들어준 ‘배려의 선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침 공기는 더 상쾌했고 내 발걸음은 더 가벼워졌다. 다음엔 나도 싸리비를 들고 이 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걷다 보니 자연의 친구들이 하나둘 인사를 건넸다. 가지 위에서 요란하게 울던 까치 가족 나무 사이를 종횡무진 뛰놀던 청솔모 한 마리.
그 작은 생명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가파른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예전 같았으면 단숨에 오를 계단이었지만 지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한 걸음씩 밟아 올랐다.
머리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이마를 타고 목덜미까지 전해졌다. 짧은 거리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이었다.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숨은 차고 온몸은 젖었지만, 그만큼 나 자신에게 작지만 분명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아직 괜찮다, 아직 나는 걷고 있다’는 감정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길을 걷다 보니 이정표가 나타났다. 남한산성까지 3.8km. 내가 출발했던 5.8km 지점에서 2km를 걸어온 것이었다.
오늘 완주가 목표는 아니었기에 샛길로 방향을 틀어 다시 내려왔다. 인기척이 없는 좁은 길을 걷다가 다시 메인 산책로와 마주했고 천천히 처음의 출발지로 되돌아왔다.
병실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몸은 땀에 젖었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벼웠다. 아침 약을 맞고 주사를 맞으며 새로운 책 한 권을 꺼냈다.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 많은 사람들이 요즘 추천하는 책이다. 나는 오늘 그 책의 첫 장을 펼치며 지금 이 계절의 나도 어쩌면 내 삶의 첫 여름을 살아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번도 맞이해본 적 없는 여름은 계획 없이 훅 들이닥쳤고 더위보다 더 숨 막히는 감정들과 마주한 여름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첫 여름, 완주’의 제목은 나를 위한 단어였고 나를 위로하는 느낌이 이었고 나를 위해 쓴 책이라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오늘은 12시에 병원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치료 동선에 들어섰다. 오후 내내 병원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이었다.
우선은 영양 상담부터 받았다. 약 30분. 어제 하루 동안 내가 먹은 음식들과 몸의 상태를 묻는 상담사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몸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다. 체중은 몇 킬로고 오늘은 식욕이 있었고 어젯밤은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
그 말들이 더 이상 부끄럽지도 숨기고 싶지도 않다. 지금 나에게는 모든 정보가 치료의 일부가 되니까.
상담을 마치고 두 번째 항암주사를 위해 발길을 옮겼다. 대략 4시간 동안 천천히 주입되는 약물들. 몸에 익숙해 길 바랐지만 처음처럼 낯설었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 기계 안에 들어가 있을 때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이건 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의 운동일지도 모른다.
상담을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두 번째 항암주사를 위한 이동을 했다. 대략 4시간 동안 천천히 아주 느리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약물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인데도 이상하게, 여전히 낯설었다. 몸이 기억하길 바랐지만 마음은 늘 처음처럼 움츠러든다.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게 때론 고맙고, 때론 괴롭다.
오늘은 첫 번째 주사를 맞았던 장소와는 다른 곳이었다. 개인 침구가 깔린 병실용 침대가 배정되었고, 나는 그 위에 몸을 조심스레 눕혔다.
부작용을 막기 위한 약물이 먼저 30분간 천천히 투여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시간. 그건 치료라기보다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몸속 세포들이 차분히 반응하길 바라며, 나는 책을 펼쳤다.
오전에 챙겨온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
오늘은 처음보다는 훨씬 덜 긴장되었고 약간의 어지러움을 제외하면 책을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이야기 속 배경인 ‘완주’라는 마을.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며 서서히 서로의 안부를 챙기게 되는 주인공과 그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였고 소설이지만, 에세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렇게 낯선 세계에 놓여, 천천히 새로운 연결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 중 한명이 항암 치료를 받았다는 설정이 나왔다. 난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막상 그 문장 앞에서 나는 더욱 깊이 공감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지나쳤을 문장이었는데, 오늘의 나는 그 문장에 크게 한숨을 쉬었고 침대에 앉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날 깜짝 놀라게 했던 부분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쑥 내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 이야기 속 주인공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름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몰입할 수 있다니, 책이 주는 경험은 늘 상상 너머에 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한 시간씩 세 번에 나누어 맞는 항암 주사의 투여가 끝났고, 나는 책을 덮었다. 김금희 작가의 이 소설은 오늘 내게 세 시간 그 이상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두려움과 기다림의 불안감이 깊은 와중에도 어딘가에 안기듯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었다. 약간의 어지러움은 있었지만, 큰 통증은 없었다.
몸을 일으켜 방사선치료실로 잰걸음을 향했다. 약 40분을 기다린 끝에 치료를 마쳤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이렇게 오늘, 두 번째 항암주사를 무사히 마쳤다.
문득 첫 번째 주사를 맞고 난 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은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눈을 감아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오늘은 다르다. 어쩌면 이 여름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걸까.
그래서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내일을 조금 더 단단히 마주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