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17일차, 항암 3회, 방사선 치료 11회.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오늘은 9시에 항암주사가 예약되어 있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어젯밤엔 목과 입안의 염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침샘이 말라버린 입안에서는 쓰라림이 이어졌고, 목은 마치 끝도 없는 갈증처럼 계속해서 물을 원했다. 마신 물은 결국 나를 화장실로 이끌었고, 그 짧은 간격이 점점 더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오전 9시. 항암주사실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침대에 앉는다. 삼성병원에서는 어떤 절차든 반드시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한다.
매일 마주치는 방사선 치료실에서도 얼굴을 익혔을 텐데도 그들은 다시 묻는다. 항암주사실도 다르지 않았다.
진료표가 침대 앞에 붙어있고 링거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주사 하나 바꿀 때마다 다시 묻는다. 음엔 귀찮게 느껴졌던 이 절차들이 이제는 조금은 안도감을 준다.
병원은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곳이기에 익숙한 얼굴조차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원칙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수액을 맞으며 책을 폈다. 항암제가 들어갈 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어젯밤 그렇게 피곤했음에도 몸은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세 번째 수액이 들어갈 때 다시 눈을 떠 책장을 넘겼고, 약간의 어지러움이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주사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방사선 치료실로 향했다. 항암 때문에 치료 예약이 밀렸고 오후 1시 40분으로 다시 잡혀 있었다.
대기하는 동안 배가 고팠다. 아침도 건너뛰었고 점심마저 이 상태면 병원에서 먹어야겠다 싶어 식당에 들렀다.
예상대로 점심시간의 식당은 긴 줄이 늘어섰고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려 샌드위치와 두유를 사 먹었다. 그리고 다시 치료실로 향했다.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니 오후 3시가 가까운 시간. ‘지쳤다’고 하자니 몸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고 ‘쌩쌩하다’ 하기엔 무언가 축 처지는 애매한 상태였다.
소파에 몸을 눕혀보았지만, 내리는 빗소리에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 그런 때가 있다. 정말 피곤한데도 잠은 끝끝내 오지 않는 날.
억지로 자려 애쓰기보다, 졸릴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게 낫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 불면증 치료에서 배운 교훈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양념이 강한 음식은 피해야 하기에 조심스레 메뉴를 살폈다. 오늘 식단은 고등어조림, 소고기무국, 브로콜리, 미역줄기볶음, 계란찜, 밥.
미각은 이미 흐려져 있었다. 딱히 맛을 느끼지는 못했고, 그저 부드럽고 딱딱하고 뜨겁고 차가운 것만 감지될 뿐. 고등어 한 점을 씹었는데 문득 퍽퍽한 식빵 조각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식사는 꼭 챙기라던 의사의 말이 떠올라 의지를 담아 숟가락을 들었다. 억지로 넣는 건 아니었지만 다 먹고 나니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은 듯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작게 웃으며 병실로 돌아왔다.
오늘은 세 번째 항암이었다. 주사를 맞기 전부터 마음 한구석이 계속 떨렸다. 이상하게도 첫 번째나 두 번째보다 더 무거운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었다. "세 번째부터는 주사를 맞는 그 순간부터 힘들어져요."
그 말이 마치 주술처럼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래서 더더욱 두려웠다. 정말로 오늘부터 무너질까 봐.
주사를 꽂는 간호사의 손길이 조심스러웠지만 그보다도 내 마음은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마치 작은 움직임에도 와르르 부서질 것 같은 하루.
하지만 예상보다 몸은 괜찮았다. 두려움을 잔뜩 끌어안고 맞았는데 의외로 큰 통증도 없었고 극심한 어지럼증도 없었다.
혹시 더한 고통을 상상했기에 지금의 고통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아직 올 고비가 내일일까?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걱정들이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왔지만 나는 그 걱정들이 현실의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조용히 막아세웠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이른 저녁. 노트북을 덮고 병실 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요란했던 아침 빗소리처럼 시작된 하루 그리고 저녁엔 더욱 세찬 빗방울이 내리는 병실에서 하늘 빛은 어두웠지만 오늘 비가 멈추지 않아도 괜찮았다.
몸과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저녁이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여전히 잘 견디고 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