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3.마음은 또 한 번 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by 마부자

입원 24일차, 항암 3회, 방사선 치료 16회.


다시 찾아온 열대야가 지나고, 창문 사이로 스며든 새벽 햇살에 눈을 떴다. 아직 꿈결을 헤매는 딸을 두고 나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오늘 오후 4시에는 이비인후과 진료가 예정되어 있다. 딸은 그 진료까지 나와 함께 있고 이후 수서역에서 대구로 내려갈 예정이다.


어제 혈액종양학과 진료 중 의사에게 음식을 먹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그는 입맛을 돌게 하는 약이 있다고 말했다.


입맛을 돋우는 약이라니. 처음에는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했다. 입맛을 떨어뜨리는 약이 있을진대 반대의 약이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겠구나.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딸은 인근 커피숍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을 사왔고 나는 여느 때처럼 병원식으로 하루의 첫 식사를 마쳤다.


아마도 약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프라시보 효과였을까. 아주 조금 빵과 계란의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목을 넘길 때의 쓴맛은 여전했다. 감각을 믿지 못하는 혀와 조심스럽게 삼켜야 하는 식사의 시간들.


다행히 따가움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었다. 지금 내게는 이 정도면 감사할 일이다.


딸은 오늘 재택근무를 허락받았다고 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병실 한쪽에서 노트북을 펴고 일을 시작했다.


무역업에 종사하는 딸은 컴퓨터만 있다면 얼마든지 일을 이어갈 수 있다고 했다. 회사에 아버지 병간호를 이유로 양해를 구했고 다행히 상사는 선뜻 허락해주었다고 했다.


그 상사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침대 곁에 앉아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 한 켠이 뭉클했다.


내가 알던 그 아이는 어느새 이렇게도 단단하고 배려 깊은 사람으로 자라 있었다.


지켜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한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내가 더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기 돠었다.


오후 다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뜨기만을 바라며 어제처럼 기다렸다. 병원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기다림은 익숙한 풍경처럼 반복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았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 하나로 이 지루한 공간도 조금은 덜 쓸쓸했으니까.


삼성병원에서는 지금 세 곳의 진료과를 병행하고 있다. 이비인후과, 방사선의학과, 혈액종양학과.


그 중에서 나를 전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 계획을 세우는 중심은 이비인후과다. 그러니까 이비인후과 교수님이 내 주치의인 셈이다.


그와의 첫 만남은 지난 6월이었다. 내 병명과 병기를 처음으로 확인했던 날의 당황과 두려움 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비교적 담담하게 내게 설명했고 그 이후 치료의 방향, 시기, 횟수를 모두 조율해 주었다.


나의 치료는 그렇게 그 사람의 진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이 시간을 어떻게 지나야 하나 막막했다. 치료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 걸어야 할 날들은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새 그 길의 절반을 넘어서서 다시 그를 마주한 오늘은 공포와 두려움 보다는 희망과 용기가 담긴 호흡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왔다. 절망의 시간도 지나보면 익숙한 풍경이 되고 치료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진료실 안 대기 의자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시간은 이제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마음속에서 수없이 길게 늘어졌던 그 시간이 이제는 익숙한 호흡처럼 지나간다. 익숙함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때론 그 익숙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주치의는 목젖 옆을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육안으로 봐도 혹이 줄었네요."


그 말에 이어 처음 방문했을 때의 사진과 오늘 촬영한 사진을 나란히 보여주었다. 내가 봐도 분명했다.


처음 사진에는 눈깔사탕처럼 크고 선명한 혹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는데 오늘의 사진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하얗게 퍼진 염증만이 남아 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관리를 잘하셨네요. 치료가 아주 잘 되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예정대로 계속 진행하시죠. 2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채 2분도 되지 않는 짧은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섰다. 딸도 나도 그 사진 한 장이 말해준 결과에 더는 물을 것이 없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걱정은 조용히 내려앉고 대신 뿌듯함이 고요히 자리를 채웠다.


진료를 마친 뒤 딸은 삼성병원 셔틀버스를 타고 수서역으로 향하겠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 배웅을 했다.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대구에서 올라와 이틀을 내 곁에 있어준 딸.


내 마음은 또 한 번 그 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 말을 오늘도 한 번 더 마음속에서 다짐하듯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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