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38일차, 항암 5회, 방사선 치료 26회.
새벽부터 요란스레 내리던 비가 온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며 퍼붓는 빗소리에 잠이 깨고 통증으로 뒤척이다 보니 밤은 길고 얕게만 흘러갔다.
늘 그렇듯 익숙한 루틴으로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링거를 맞았다. 몸을 눌러오는 피로에 잠깐 눈을 붙였는데 그 사이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이었다.
“아빠, 엄마 퇴원했어. 의사 선생님이 앞으로 1년 뒤 검사만 이상 없으면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대.”
순간, 가슴 안에서 작은 불빛 같은 희망이 켜졌다. 이 지루하고 버거운 치료의 터널 끝에 분명히 길이 있다는 걸, 딸의 목소리가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오후 4시 30분, 예정된 이비인후과 진료를 위해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 대기실에는 늘 그렇듯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기실에 앉아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명의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와 거의 같은 날 이곳에 처음 왔던 중년 남성이었다. 그때 그는 손에 진료 서류를 잔뜩 쥐고 초조한 눈빛으로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와 가족에게 전화를 하던 그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암이래. 그런데… 수술하면 된대, 수술도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지 뭐야!”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기쁨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고 나 역시 그 순간 묘한 연대감을 느꼈었다. 오늘 다시 마주한 그는 여전히 수술 전인 듯 보였지만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어쩐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병원이라는 이 무거운 공간 안에서도, 사람은 이렇게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걸 그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나를 주치의는 반가운 미소로 맞았다.
의사는 내 목을 살펴보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이 하셨네요. 암세포는 이제 다 사라졌어요. 남은 네 번의 치료만 잘 마무리하고 CT 한 번 찍어봅시다. 이상 없으면 6개월 뒤에 한 번만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내 귓가를 울리며 천천히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데는 몇 초가 필요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안도라는 감정이 가슴을 벅차게 밀고 들어왔다.
치료의 고통 속에서 잠시 미뤄두었던 희망이 오늘 이 작은 진료실 안에서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상담을 마친 뒤 CT 촬영 일정을 8월 말로 예약했고, 9월 10일 오후에는 최종 상담이 잡혔다. 그날, 주치의의 입에서 ‘완치’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작은 기대와 커다란 희망을 품고 병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서울의 하늘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새벽부터 이어진 비로 인해 밤새 잠을 설쳤지만 오늘만큼은 이 빗줄기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의 비는 내게 두 가지 커다란 기쁜 소식을 안겨준 하늘의 축복처럼 느껴졌다. 비에 젖은 도심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이 길 끝에는 분명히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